남성일 <서강대 경제대학원장>

지난 12월 초 일본을 다녀왔다. 떠나는 날 인천공항의 환율은 100엔에 1650원이었다. 일 년여 전과 비교하면 두 배나 오른 셈이다. 똑같은 1000엔짜리 점심이라도 이젠 느낌이 달랐다. 환율의 위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합리적 판단은 여기까지뿐이었다. 쇼핑시간이 주어지자 같이 간 일행들은 그 '비싼' 화장품과 건강약품을 비롯한 여러 제품들을 서슴없이 집는 것이 아닌가. 사실 좀 놀라긴 했지만 일행들의 행동이 비합리적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들의 구매는 충분히 합리화될 수 있다. 내가 놀란 건 그들의 구매동기에 숨어있는 중요한 요인 때문이다. 그건 믿음이었다. 일제는 가짜가 없고 믿을 만하다는 신뢰감,그것이 그들의 지갑을 활짝 열게 한 것이다. 이들을 베이징에 데려다 놔보라. 과연 여기서처럼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열까. 믿음은 그 자체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책을 사면 똑같은 책인데 어떤 곳은 더 비싸게 판다. 그래도 거기서 사는 이유는 믿을 만하기 때문이다. 파손되지 않게 배송해주거나 반품요인이 생겼을 때 신속하게 처리해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신뢰감이 가격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브랜드가치라는 것도 본질은 브랜드에 녹아있는 신뢰감의 가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믿음은 좋은 기업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회사 경영진을 신뢰하면 직원들은 어려운 일도 군말없이 해낸다. 자신의 땀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에 회사에 더 보탬이 되려고 노력한다. 직원과 노동조합이 회사에 믿음을 주면 회사는 어려운 시기지만 가능한 한 인력감축 없이 다 함께 가려고 온갖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믿음은 경제전체로는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적 자본이다. 믿음이 있어야 거래가 이뤄지며 거래당사자 간 믿음의 정도에 따라 가치창출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애로우는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상거래는 신뢰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에서 보는 경제적 후진성의 대부분은 결국 상호신뢰의 결핍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중국의 부자들이 자국에서 판매되는 물건을 못 믿고 일본에 가서 명품쇼핑을 한다는 보도가 사실인 한 중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경제에서 믿음이라는 사회적 자본의 크기는 어떠한가. 우리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는 꾸준히 커져왔다고 생각된다. 이젠 몇 품목을 제외하고는 국산제품이 외제를 대체하고 있다. 또 우리 기업에 대한 믿음도 커졌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기업들은 더 투명해지고 튼튼해졌다. 그러나 서비스 분야에 대한 믿음은 정체된 경우가 많다. 특히 공공서비스화된 교육에 대한 사회적 믿음은 지난 20여년 사이 오히려 크게 후퇴했다. 많은 사람들은 1960~70년대의 고교교육보다 90년대 이후의 고교교육이 더 질이 떨어졌다고 믿는다. 정부서비스 또한 규제분야에 있어 믿음이 없다. 정부는 민간을 믿지 못하고 민간은 정부의 밥그릇 챙기기를 의심한다.

믿음이 강해지면 서로 거래를 키우고 지갑을 연다. 우리 경제의 중요한 과제는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 이제까지 정체된 분야인 교육,의료 등 서비스시장을 키워야 한다. 그동안 이 분야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가짜가 쫓겨나지 않도록 규제로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종 규제를 풀어 소비자의 선택으로 서로 신뢰할 만한 서비스를 만들도록 하자.교육과 의료분야가 우리 제품이 지금 갖고 있는 정도의 신뢰를 얻게 된다면 국내수요뿐 아니라 해외수요 창출도 막대할 것이다. 고용증대는 물론 국민소득 4만달러 달성 또한 가시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