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오래된 유머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육사,가톨릭대,성균관대 남학생이 여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여친이 춥다고 말했다. 서울대생은 "나도 추워"하며 몸을 웅크렸다. 연세대생은 겉옷을 벗어주고,고대생은 팔을 슬쩍 둘렀다. 육사생은 "함께 뛰자",가톨릭대생은 "기도하자",성균관대생은 "양반은 추워도 내색하면 안돼"라고 말했다.'

순전히 웃자고 만들어진 얘기일 테지만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추위를 견디는 방법이 제시돼 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안 그래도 겨울이면 대학 입시와 취업 실패 때문에 뼛속까지 시린 이들이 늘어나는데 올 겨울엔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따른 불황까지 겹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춥다. 갑작스런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이들은 더할 것이다.

유독 혹독했던 겨울을 난 적이 있다. 첫번째는 재수 끝에 대학입시에 또 떨어졌던 겨울이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한강 둑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매서운 바람에 손발의 감각은 사라지고 얼굴은 만지면 곧장 부서질 것 같았다. 그러다 무심코 들어선 다방의 온기에 나는 죽지 말고 살아봐야겠다 결심했다.

출판사 편집부에 취직한 뒤 대졸생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은 60%만 받는다는 걸 알고 다시 입시를 치렀다. 두 번째 끔찍한 추위는 졸업하던 해 닥쳤다. 애매한 전공 탓에 서류심사에 떨어지기 일쑤,최종면접까지 올라가서도 "전공이 "에 밀렸다. 세 번째는 첫 직장에서 상사와 다투고 사표를 낸 다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참혹한 겨울을 만난 이유의 절반 이상은 내게 있었다. 가정형편 핑계대지 말고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입시에 두 번씩 실패하진 않았을 테고,전공에 상관 없이 착실히 준비했더라면 취업 고생 또한 덜했을 것이다. 옮길 자리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덜컥 그만둔 것도 찬바람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일찌감치 한대(寒帶)에 놓였던 경험은 이후 세상을 좀 더 치열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다신 삭풍 속에 내동댕이쳐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일찍 출근하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 '에잇' 싶어질 때마다 몰아치는 바람에 날려 강물로 떨어질 것 같던 그 둑길,그 날의 서러움을 떠올리며 꾹 눌러 참았다.

개인과 기업,나라 가릴 것 없이 스산하기 짝이 없다. 계절이야 몇 달 있으면 지나갈 테지만 불황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마당이다. 길고 긴 겨울을 나자면 동물은 겨울잠을 자거나,멀리 이동하거나,번데기가 되거나,털갈이를 한다. 사람은 앞서 예로 든 데이트족처럼 잔뜩 웅크리거나 옷을 껴입고,껴안거나 뛰고,기도하고, 안 추운 척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겨울을 헤쳐가자면 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또 한 가지, 겨울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짐을 최소화하고 조심스럽게 계속 움직여야 한다. 욕심 때문에 짐을 못 버리고 주춤거리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잎을 떨군 채 겨울을 난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듯 사람도 겨울을 견디면 내공을 얻는다.

제아무리 혹독한 겨울도 언젠간 끝날 것이다. 추위와 불안에 떨고만 있을 게 아니라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배짱과 용기,그 어떤 일에도 지치거나 무너지지 않는 끈기와 뚝심으로 버텨 볼 일이다. 어제는 역사,내일은 미스터리이고 오늘(present)은 곧 선물(present)이라는 더글러스 대프트 전(前) 코카콜라 회장의 말도 새겨보면서.

"인생이란 두 손으로 일,가족,건강,친구,영혼이라는 다섯 개의 공을 움직이는 저글링 같은 것이다. 일이라는 공은 고무같아 떨어뜨려도 곧 튀어 오르지만 나머지는 유리같아 떨어뜨리면 긁히고 깨지고 흩어져 다신 전처럼 될 수 없다. 그러니 과거나 미래에 집착해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무엇보다 사랑의 문을 닫지 말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