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도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은광(鑛)을 찾아나서는 '골드 러시(gold rush)'가 있었다. 통계청이 광복 이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통계를 한글로 번역했더니 1934~1939년 사이 금·은광에 대한 광업출원이 2만4522건이었다. 연평균 4000건을 넘는데 평상시(1930년 733건)보다 훨씬 많은 개발 허가 신청이 이 기간에 몰렸다는 분석이다.

통계청은 17일 광복 이전의 경제·사회상을 통계로 알아볼 수 있도록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번역한 뒤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국가통계포털(www.kosis.kr)에 올렸다. 국토면적 인구 보건 교육 등 14개 분야 2300여개의 통계표가 수록됐다.

통계에 따르면 금·은광을 찾아서 광업을 해보겠다는 허가 신청은 1934년 5732건을 시작으로 6년간 총 2만4522건이 몰려 들었다. 1920년대에는 신청이 연평균 230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시기 금·은광 탐사가 유행처럼 번진 것으로 해석된다.

또 1938년 한국인 인부의 일당은 92전으로 일본인(1원78전)의 절반에 불과했다. 서울 소매물가 기준으로 쌀 1되가 23전이었으니까 하루 벌어서 쌀 4됫박을 겨우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은행 예금액은 1910년에 총 1689만원이었는데 1943년에는 25억5130만원까지 늘었다. 같은 기간 1인당 예금은 1.3원에서 96원으로 100배 가까이 증가했다.

1930년 당시 한국인의 사망 원인은 수막염 뇌성마비 간질 등 신경계 질환이 19.8%로 가장 많았다. 위,간질환 등 소화기병이 18.2%, 폐렴 등 호흡기병이 14.2%로 각각 뒤를 이었다. 1941년 한 해에만 곰과 이리 표범 호랑이 등 산짐승에 의해 사람 61명과 가축 2445마리가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910년 평균기온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서울이 10.5도→13.3도 △부산 13.1도→15.3도 △인천 10.2도→12.9도 등으로 전국적으로 기온이 3도 가까이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