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에 욕먹고 돈잃고…은행원 피눈물 난다

A은행 지점장인 박모씨는 1년 전 직원들에게 역외펀드 판매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직접 5000만원짜리 펀드에 가입했다. 환율 하락에 따른 위험을 회피(헤지)할 목적으로 선물환거래도 맺었다. 최근 지점을 옮긴 박씨는 이전 지점에서 '펀드를 유지하려면 1500만원을 추가 납부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고민 끝에 펀드를 해약했다. 손에 쥔 돈은 고작 1000만원뿐이었다. 박씨는 "지점장인 나조차도 역외펀드나 선물환거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제대로 몰랐다"면서 "하소연할 곳도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금융가에선 "금융위기 최대 피해자는 은행원"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펀드 투자 손실을 입은 고객은 피해자이고 은행원들은 가해자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정작 큰 손해를 본 사람은 은행원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은행 지점장이나 부장급 간부 가운데에는 펀드나 변액보험에 30개까지 가입한 경우도 있다. 한 시중은행 부장은 "내 명의로 14개,가족 명의로 6개 펀드에 가입했다"며 "주가 폭락으로 2800만원 정도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그는 "펀드나 변액보험 판매실적이 인사평점에 높게 반영돼 많이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 퇴직연금에 넣었다가 손해를 본 사례도 있다. 한 은행원은 "고객들에게 상품을 권하기 위해 나도 확정기여형(퇴직금 운용 실적에 따라 받을 돈이 바뀌는 퇴직연금)으로 가입했는데 그 돈이 대부분 펀드에 들어가 원금의 60%를 까먹었다"고 말했다.

일선 은행원들 가운데는 "나도 가입했다"는 말로 고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펀드 등에 자신이 먼저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한 시중은행 직원은 "나는 물론이고 가족과 친척,주변 사람들까지 펀드에 가입하게 했다"며 "투자 실적이 워낙 엉망이어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울먹였다. 그는 "작년까지 수익률이 매우 높았던 중국펀드를 옆에서 지켜본 젊은 은행원들이 최근 펀드에 많이 가입했다"며 "총각이나 처녀 은행원들 가운데서는 '돈 없어서 결혼 못한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중소기업 등이 어려울 때 우산을 뺏는다'는 사회적 비난이 쏟아지는데다 언제 구조조정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겹쳐 은행원들은 하루하루를 스트레스 속에서 보내고 있다. SC제일은행은 직원 193명의 명예퇴직 신청을 받은 상태이며 한국씨티은행도 연말에 150명 가량을 감원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중복 점포 통폐합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며 농협중앙회는 본부 인원 20%를 감축할 예정이다.

김인열 금융노조 홍보선전본부장은 "은행들이 최근 3~4년간 몸집불리기 경쟁을 벌이면서 직원들에게 과도한 영업을 시켰고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직접 해결토록 하는 풍토가 조성됐다"며 "경기가 어려워지자 어려움을 토로하는 은행원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정인설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