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32) 혁신전공사 ‥ 2년마다 전직원 해외연수, 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꿈에서 한 약속도 지켜라" 할아버지의 유지 지킬 것
혁신전공사에는 독특한 직원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2년마다 실시되는 전직원 해외연수가 바로 그것이다. 3박4일간 아예 공장문을 걸어 잠근 채 떠난다. 창립 50주년인 2005년에는 중국 상하이를 방문,자기부상열차 등을 둘러본 데 이어 지난해에는 대만 무인경전철 시스템 업계를 견학했다. 내년엔 일본 철도업계를 둘러볼 계획이다. 한 해 비용만 3000만원가량 들고,며칠씩 회사를 비우는 부담이 적지 않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이유에서다.
공부 욕심이 큰 직원에게 '원할 때까지'교육비를 대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직원 56명 중 박사와 석사학위 수료자 2명이 나왔고,5명이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교육을 유난히 강조했던 창업주와 김 회장이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김희웅 대표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일본식 교육을 받으셔서 그랬는지 모르지만,할아버지께선 꿈에서 한 약속까지도 지킬 것을 강조했다고 들었다"며 "아버지가 '전 직원을 연구원으로 만들겠다'고 할아버지께 드린 약속이 가족이 지켜나갈 평생 화두가 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 스스로부터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4년 전 노인복지에 관한 논문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따내기도 했다. 최근엔 미술공부에 나서 입문 3년 만에 경기미술대전 등 지역미전에서 입상도 했다.
2005년 취임한 김 대표의 꿈은 여행가였다. 유적 탐방에 관심이 많아 여행사를 차리고 싶었다. 지리교육을 전공하고 일본어 능력 1급 자격증을 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를 키워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군말 없이 회사경영에 뛰어들었다. 갈등은 없었을까. "아버지를 존경했기 때문에 꿈은 잠시 유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기를 몰랐기 때문에 경영은 녹록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배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전기가 위험하다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어요. 20~30년씩 된 베테랑 기술자들이 장비엔 접근조차 못하게 하고 기술설명도 해주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죠."
회식이 있는 날에도 서점에 들렀다. 각종 전문용어가 빼곡한 전문서적이지만,졸음을 쫓아가며 밤새 읽었다. 지금이야 회사 영업을 총괄할 만큼 회사 안팎에서 전문가 소리를 듣는 수준에 올랐지만,당시엔 암호같은 설계도 자체가 '공포'였다.
'기술혁신'은 김 대표 자신과의 약속이다. 세계적인 '강소기업'이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닮고 싶은 회사로 그는 철도차량과 장비분야 세계 1위인 캐나다의 봄바르디아를 꼽았다.
"규모로는 따라갈 수 없겠죠.하지만 해외업체들로부터 기술제휴 요청이 끊이지 않고 로열티로 순이익을 올릴 수 있는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만들겠습니다. 제가 못하면 제 자식들이 그 꿈을 잇게 하고 싶어요. "
혁신전공사에는 독특한 직원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2년마다 실시되는 전직원 해외연수가 바로 그것이다. 3박4일간 아예 공장문을 걸어 잠근 채 떠난다. 창립 50주년인 2005년에는 중국 상하이를 방문,자기부상열차 등을 둘러본 데 이어 지난해에는 대만 무인경전철 시스템 업계를 견학했다. 내년엔 일본 철도업계를 둘러볼 계획이다. 한 해 비용만 3000만원가량 들고,며칠씩 회사를 비우는 부담이 적지 않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이유에서다.
공부 욕심이 큰 직원에게 '원할 때까지'교육비를 대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직원 56명 중 박사와 석사학위 수료자 2명이 나왔고,5명이 현재 대학에 재학 중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교육을 유난히 강조했던 창업주와 김 회장이 '약속'을 맺었기 때문이다. 김희웅 대표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일본식 교육을 받으셔서 그랬는지 모르지만,할아버지께선 꿈에서 한 약속까지도 지킬 것을 강조했다고 들었다"며 "아버지가 '전 직원을 연구원으로 만들겠다'고 할아버지께 드린 약속이 가족이 지켜나갈 평생 화두가 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 스스로부터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4년 전 노인복지에 관한 논문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따내기도 했다. 최근엔 미술공부에 나서 입문 3년 만에 경기미술대전 등 지역미전에서 입상도 했다.
2005년 취임한 김 대표의 꿈은 여행가였다. 유적 탐방에 관심이 많아 여행사를 차리고 싶었다. 지리교육을 전공하고 일본어 능력 1급 자격증을 딴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를 키워달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군말 없이 회사경영에 뛰어들었다. 갈등은 없었을까. "아버지를 존경했기 때문에 꿈은 잠시 유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김 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기를 몰랐기 때문에 경영은 녹록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배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전기가 위험하다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어요. 20~30년씩 된 베테랑 기술자들이 장비엔 접근조차 못하게 하고 기술설명도 해주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죠."
회식이 있는 날에도 서점에 들렀다. 각종 전문용어가 빼곡한 전문서적이지만,졸음을 쫓아가며 밤새 읽었다. 지금이야 회사 영업을 총괄할 만큼 회사 안팎에서 전문가 소리를 듣는 수준에 올랐지만,당시엔 암호같은 설계도 자체가 '공포'였다.
'기술혁신'은 김 대표 자신과의 약속이다. 세계적인 '강소기업'이 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닮고 싶은 회사로 그는 철도차량과 장비분야 세계 1위인 캐나다의 봄바르디아를 꼽았다.
"규모로는 따라갈 수 없겠죠.하지만 해외업체들로부터 기술제휴 요청이 끊이지 않고 로열티로 순이익을 올릴 수 있는 작지만 강한 기업을 만들겠습니다. 제가 못하면 제 자식들이 그 꿈을 잇게 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