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등 62개 연기금 은행인수 가능
증권·보험지주사에 제조업 자회사 허용


정부가 내년 상반기부터 국내외 기업의 시중은행 지분 한도를 현행 4%에서 10%로 늘리고 국민연금 등 62개 공적 연기금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은행 인수를 허용하기로 했다.

이같은 정부의 금산분리 규제 완화는 최근 불거져 나오고 있는 금융 위기 가능성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그룹사들이 복잡한 순활출자 방식으로 얽혀 있는 현재의 구조 대신 지주회사 전환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산업자본이 금융기관을 장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금융 사금고화 논란도 제기될 전망이다.

◆금산분리 규제 완화
금융위원회는 13일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법안은 14일 입법 예고와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11월 말 국회에 제출된다.
개정안에 따르면 외국기업을 포함해 국내외 산업자본(기업)이 의결권 있는 시중은행 지분을 가질 수 있는 한도가 10%로 상향 조정된다.
또 산업자본이 유한책임사원(LP)으로서 출자 비율이 10%를 초과하거나 서로 다른 대기업집단 소속 계열사들의 출자 비율이 30%를 초과한 사모펀드(PEF)는 산업자본으로 간주돼 왔는데, 이 요건도 개정 후에는 각각 30% 이상, 50% 이상으로 완화돼 사실상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가 가능해졌다.

국민연금 등 62개 공적 연기금도 금융감독원의 검사권 행사와 이해상충 방지 장치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은행을 인수할 수 있다. 또 대주주가 산업자본이 아닌 외국계 은행도 해외에서 보유한 제조업체의 자산이 산업자본 판단에서 빠지게 돼 국내 은행을 인수할 기회가 커지게 됐다.

역차별 가능성이 생긴 국내 은행도 구조조정기업의 출자 전환 등으로 갖게 된 제조업체의 자산은 산업자본 판단 기준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특히 은행을 제외한 보험·증권지주회사는 제조업 자회사를 둘 수 있게 돼 기존 대그룹의 금융지주회사가 가능해졌다.

◆기업의 사금고화 철저히 감독
기업이 은행 지분을 4%를 초과해 소유하면서 최대주주이거나 경영에 참여할 경우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며 은행 임원 선임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또 산업자본이 은행과 불법 내부거래를 한 혐의가 있을 때 금융감독원이 해당 대주주에 대해 현장 조사를 벌이고 과징금 부과와 대주주 특수관계인의 사외이사 선임 금지 등의 제재를 하게 된다.
아울러 PEF는 은행 지분을 4% 초과해 최대주주가 되려고 할 때 사전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LP는 은행 경영에는 간여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면 은행 보유지분을 1개월 안에 팔아야 한다.

증권지주회사의 경우 금융 자회사에 제조업 손자회사가 허용되지만 보험지주회사의 보험 자회사는 제조업 손자회사로 거느리지 못하게 했다.
지주회사는 제조업 자회사에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신용공여를 할 수 없으며 지주회사와 대주주 간에는 신용공여와 발행주식 취득 등에 제한을 받게 된다. 금감원은 제조업 자회사에 대해 현장 검사권을 갖는다.

◆금융-제조업 장벽 제거 논란
금융위의 금산분리규제 완화로 사실상 금융-제조업 장벽이 무너지면서 리스크 확산 등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 지주회사에 적용되고 있는 금산분리 규제가 풀리면 대기업집단의 지주회사 전환이 속도를 낼 수 있지만 금융업과 제조업 사이의 방어벽이 약해져 금융에서 발생한 위험이 제조업으로, 반대로 제조업의 부실이 금융업으로 전이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공적 연기금이 은행을 소유할 경우 정부가 간접적으로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산업자본이 PEF를 통해 은행 경영에 간여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를 늘리고 중장기적으로 소유 규제를 없애면 금융산업의 중추인 은행이 대기업에 좌우되며 자금 흐름이 왜곡되거나 부실화하는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금산분리 완화정책으로 금융기관이 재벌 대기업의 사금고가 될 수 있고 경제주체간 형평성을 해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 금융산업을 사실상 지배하는 외국자본과 힘의 균형을 이루고 대형 금융회사 출현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전효찬 수석연구원은 "산업자본이 은행지분을 10%까지 보유할 수 있게 해도 제도적인 여건상 지배하기는 쉽지 않다"며 "보험·증권지주회사에 대한 규제도 국제 기준보다 과도해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박세환 기자 gre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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