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급훈(級訓)은 학생들이 일년 내내 가슴에 새겨야 할 일종의 덕목이다. 과거엔 담임 선생님이 정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성실,정직,슬기,질서,협동,사랑 등이 단골 메뉴였다. 이런 낱말들은 평범하긴 하지만 인격을 도야하고 마음의 지표가 되는 것이어서,포근하면서도 심성이 맑아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급훈들이 완전히 변하고 있다. 선생님 대신 학생들이 정하다 보니,희화화되는가 하면 튀는 게 예사고,유행어를 따라 재밋거리로 만들어진다. '담임이 뿔났다''공부해야 밥 준다''산은 산이고 물은 셀프다''니 성적에 잠이 오냐''급훈 보냐? 칠판 봐라!''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하는 식이다. 이기적이고 출세지향적인 급훈도 부지기수다.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삼십분 더 공부하면 내 남편 직업이 바뀐다'는 급훈은 가관이다. 한창 공부하는 시기에 학습유발동기를 겨냥해 정한 모양인데,그래도 적절하다는 느낌은 갖기 어렵다.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가꾸어야 할 시기에 진지함이라곤 도대체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제주도 의회 강무중 의원이 엊그제 공개한 도내 초ㆍ중ㆍ고교의 급훈에서도 전혀 교육적이지 못한 이 같은 급훈들이 다수 확인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는 경쟁사회를 표현하는 살벌한 내용도 아무 거리낌없이 교내에 버젓이 붙어있다고 한다.

급훈들이 이렇다 보니,나누고 베풀고 봉사하고 사랑을 실천하려는 내용들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상식이 통하는 생각과 행동은 아랑곳없이,마치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치 경쟁을 벌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거나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는 급훈은 멋져 보인다. '인사를 잘하자''참되고 착하게 살자'고 실천적인 다짐을 했던 오래전의 급훈들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