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최고’라는 인식 확산
30억∼100억원대 중·소형 빌딩까지 매각
MMF나 6개월 이하 단기 금융상품으로


미국발(發) 금융쇼크로 전 세계가 혼란에 쌓인 요즘,어떤 불황이 찾아와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한국 부자들에게도 동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수십억∼수백억대 부자들이 무덤까지 들고 갈 것처럼 여겨졌던 투자상품인 30억∼100억원대 중·소형 빌딩 매물들이 시장에 등장할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금이 최고'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중·소형 빌딩까지 매각해 머니마켓펀드(MMF)나 6개월 이하짜리 단기 금융상품에 넣어두려는 것이다.

◆중·소형 빌딩 매물 출현 본격화되나

시중은행의 일선 프라이빗 뱅킹(PB)팀장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PB서비스를 이용하는 부자고객들이 '드디어' 중·소형 빌딩의 매각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서 영업 중인 한 PB팀장은 "역삼동에 소유하고 있던 지하 1층~지상 7층 규모의 빌딩을 150억원에 매각하려고 내놨다가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직후 매수희망자가 매수의사를 철회하는 바람에 거래가 중단된 고객이 있다"고 전했다. 금융위기 발생 직전에 빌딩을 내놓고 가격을 올려 받기 위해 배짱을 부리던 빌딩주인이 최근 거래가 깨지고 다른 매수희망자도 나타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런 흐름이 이 PB점포뿐 아니라 전 은행권 PB센터로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중·소형 빌딩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기 시작하는 현상은 결코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게 일선 PB팀장들의 설명이다.

강남의 '알짜' 지역에 위치한 30억∼100억원짜리 중·소형 빌딩은 수백억원에 달하는 대형빌딩과 달리 공실률이 낮고 관리가 손쉬워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다. 그래서 상반기까지만 해도 PB팀장들에게 "매물이 나오면 언제든지 연락달라"는 고객들이 눈에 띌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랬던 중·소형 빌딩의 매물 출현 조짐이 나타났다는 것은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의연할 것처럼 보였던 부자들도 요즘 같은 '금융패닉'상황에선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강우신 기업은행 분당파크뷰지점 PB팀장은 "실물경기 침체로 월세가 잘 나가지 않아 중·소형 빌딩의 연 수익률이 4%대에 머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며 "관리 중인 고객 가운데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송파구나 신촌 일대의 수십억원대 알짜 빌딩을 매각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같은 일련의 조짐들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고준석 신한은행 갤러리아팰리스지점장은 "중·소형 빌딩의 수익성 악화로 매도 시점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부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주목할 만하지만,매물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수준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그만큼 중·소형 빌딩에 대한 부자들의 '짝사랑'이 심하다"고 설명했다.

◆단기자금 운용 현상은 갈수록 심화

강남 아줌마들은 요즘 전체 자산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늘리고 있다. 현금비중을 늘렸다는 의미는 투자자금을 정말 현금으로 들고 있다는 게 아니라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MMF나 MMDA,CMA 등에 넣어두는 비중을 늘렸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유자금을 3∼6개월짜리 단기 금융상품에 넣어두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아줌마들도 많다. 강남권 소재 한 PB센터 관계자는 "만기가 돌아온 예금상품을 펀드라든가 부동산 등에 새롭게 투자하는 고객은 최근 1∼2개월 새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며 "대신 '정기예금+알파'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3∼6개월짜리 특정금전신탁에 돈을 집어 넣어 두고 시장을 관망하는 고객들이 많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재테크 시장 냉각현상이 6개월 이내의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아예 예금기간을 늘려잡는 투자자들도 나오고 있다.

펀드 등 투자상품에 대한 신규가입은 전국적으로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는 게 PB팀장들의 설명이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영업 중인 은행 지점들 가운데는 아예 지점 차원에서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 권유를 자제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곳도 등장하고 있다.

이상수 신한은행 압구정로데오지점장은 "지점 차원에서 투자상품의 신규 가입권유는 될 수 있으면 자제하기로 했다"며 "당분간은 고객들의 재산을 보호·관리하는 데 중점을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최철민 미래에셋증권 서초로지점장은 "조금 과장하면,최근 1주일 새 금융상품의 신규 판매가 이뤄진 금융회사 지점은 전국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라며 "당분간 '소나기'는 피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