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다. 3개월째 이어지는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31일 방콕의 정부 청사는 1만여명의 시위대에 의해 6일째 점거된 상태다. 푸껫 국제공항 등 3개 공항이 일시 폐쇄되면서 한때 관광객 수천명의 발이 묶이기도 했다. 정치 리스크가 불거져 주가와 바트화가 급락하고 경제성장률도 둔화되면서 일각에선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태국의 외환위기가 재연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Global Issue] 파국으로 치닫는 태국 정국‥주가ㆍ바트화 가치 동반 급락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지난 29일 방콕에서는 사회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대(PAD)가 주도한 시위대 2000여명이 경찰청사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저지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오전 경찰과의 충돌로 시위대 10여명이 부상하자 시위대가 관련 진압 경찰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며 경찰청 난입을 시도한 것이다. 같은 날 태국 남부 지방인 송클라와 푸껫 지방의 주민 수천명이 공항을 점거,푸껫 핫야이 크라비 등 공항 세 곳이 폐쇄됐다. 핫야이 공항은 30일,푸껫 공항은 31일 다시 문을 열었지만 완전 정상화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의 공항 점거는 올 1월 취임한 사막 순다라벳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특히 기관사를 포함한 국영철도 노조원 255명도 반정부 시위에 동조파업을 벌여 북부 12개,북동부 27개,남부 39개 정기 철도노선이 제대로 운행되지 못하고 있다. 철도 노조는 국영기업인 전력과 수도공사 노조와 파업 확대 여부를 논의 중이다.

하지만 사막 총리는 시위대에 굴복해 사임하지 않겠다고 맞서 정국 혼란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사막 총리는 30일 "(PAD 세력의) 위협 때문에 절대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는 법의 위임하에 총리가 됐고 법이 나를 허락하지 않을 때에만 떠나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서 손티 림통쿨 PAD 공동대표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꼭두각시인 사막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반정부 시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사막 총리 퇴진설 △군부 쿠데타설 △경찰 진압 강화설 △내각불신임을 묻는 긴급 선거설 △정치 영향력이 큰 국왕의 개입설 등 각종 소문이 난무하며 태국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사막 총리가 비상사태 선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군부가 이를 거부했으며,군부 최고책임자는 총리가 퇴진하든지 긴급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위 격화 원인은 정치불신과 민생고

[Global Issue] 파국으로 치닫는 태국 정국‥주가ㆍ바트화 가치 동반 급락
시위를 주도하는 PAD는 2006년에도 탁신 당시 총리에 반대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를 이끈 바 있다. 태국 군부는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권좌에서 축출했다. 하지만 16개월간 군정을 거친 뒤 치른 총선에서 지난 1월 탁신 전 총리의 최측근인 사막을 중심으로 한 연립 정부가 탄생해 PAD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한 달 뒤인 2월 탁신 전 총리가 귀국한 데 이어 5월 사막 총리가 군부 쿠데타 이후 수립된 과도정부 아래서 제정된 신헙법을 개정해 탁신을 사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반정부 시위가 다시 시작됐다. 탁신의 꼭두각시인 사막 총리가 태국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며 전면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것.태국 의회가 6월27일 사막 총리 및 7명의 각료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부결시키자 시위는 더욱 불이 붙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탁신이 부패 혐의에 대한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지난 11일 영국으로 도피해 망명을 신청하자 시위는 격화되는 양상이다.

시위 격화에는 인플레에 따른 서민 생계의 어려움도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 안팎에 그쳤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국제유가와 식품가격 급등에 따라 1월 4.3%,3월 5.2%,5월 7.6%,7월 9.2% 등으로 상승폭이 갈수록 확대되는 모습이다.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년 만의 최고치다.


◆발목 잡힌 경제

"태국 경제의 최대 위협은 인플레보다 정치불안이다. "(태국 중앙은행 아차나 와이쾀디 부총재) 실제 정국 불안으로 당장 태국 국내총생산(GDP)의 6%를 차지하는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게 됐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한때 공항이 폐쇄됐던 푸껫의 경우 지난해 태국을 방문한 관광객 1600만명 가운데 3분의 1이 찾은 대표적인 휴양지다.

태국 증시에선 8월 들어 3억2300만달러의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등 외국 자본의 이탈이 본격화하면서 주가와 바트화 가치도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태국 증시의 SET지수는 시위가 시작된 5월25일 직전에 비해 21.8% 하락했고,같은 기간 바트화 가치는 6.7% 떨어졌다. 바트화 가치는 작년만 해도 15.6% 상승하며 달러당 29바트대에 진입했지만 정치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최근 달러당 34바트대로 급락했다.

경상수지 흑자와 외국인투자 증가 등에 힘입어 1998년 말 284억달러에서 올 5월 말 기준 1064억달러로 꾸준히 증가한 외환보유액도 지난 22일 현재 1017억달러로 감소했다.

성장률도 1분기만 해도 전년 동기 대비 6%대에 달해 작년 4분기(5.7%)를 웃돌았지만 2분기엔 5.3%로 둔화됐다. 전문가들의 예상치(5.7%)를 밑돈 것이다. 태국 정부는 지난 25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4.5∼5.5%에서 5.2∼5.7%로 상향 조정하는 등 낙관론을 펴고 있지만,스탠다드차타드는 4.8% 성장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 파산은 상반기 월 평균 1149개에서 6월에는 1681개로 늘어나는 등 기업 환경도 악화되고 있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