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팅턴은 국민의 투표에 의해 두 번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국가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고 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비로소 국민들이 상반된 이념적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념 간에도 경쟁은 이뤄진다. 따라서 시대정신에 부합되는,국가발전 친화적인 이념체계는 투표라는 '경쟁과정'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 '이념과 가치'를 선택했다. 그러한 이념은 '우파적'이라기보다 '반(反)좌파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국민의 선택은 참여정부 실패라는 뼈저린 '경험칙'에서 나온 일종의 '반작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의 당선은 사실상 참여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과 분노가 빚어낸 결과다.
이명박 정부는 승리에 취한 나머지 당선의 배경을 적확(的確)하게 읽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의 압도적 승리는 국민의 과잉기대와 조급증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경제 살리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평등주의에 함몰된 좌파 10년 동안 구조적으로 왜곡돼 온 경제운영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경기부양' 이전에 참여정부 경제실패의 기저에 깔린 좌파 정책의 폐해를 냉정하게 규명했어야 했다. 즉 이념적 지형에 따라 좌파적 이념과 대비되는 우파적 이념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철학의 빈곤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가 이를 웅변한다. 실용은 '시대정신'일 수도 '국정철학'일 수도 없다. 이념은 배의 '닻'에 비유된다. 이렇게 '이명박 호(號)'는 표류했다.
이명박 정부의 또 다른 치명적 실수는 좌파정권 10년 동안 조직화되고 기득권화된 좌파세력이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고지(高地)만 바뀌었을 뿐 진지(陣地)가 전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사상전(思想戰)의 인내가 요구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소영,강부자,에스라인' 등의 오만은 정권 상실의 허탈감에 빠진 좌파에게 저항의 명분을 안겨다 주기에 충분했다. 촛불시위의 동력은 어찌 보면 이명박 정권이 제공한 것일 수도 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하면서 치른 홍역을 '학습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민들이 우파적 가치에 기초한 개혁에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설득하고 좌파와 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좌파정권의 '부정적 유산'을 냉정하게 구별해내야 한다. 참여정부의 가장 큰 해악은 국민을 피아(彼我)로 나누어 대립구도를 만든 것이다. 위정자에게 대립구도는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정치적 수단이기 때문에 금선(禁線)인 것이다. 강남,명문대,재벌은 부지불식간에 서민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는 '공공의 적'이 됐다. 종합부동산세 부과 이유도 간단하다. 단지 '98 대 2'라는 것이다. 정책에 '증오'와 '억지'를 담아내면 국가는 폭력조직으로 변하고 만다. 양극화도 예외가 아니다. 참여정부는 중산층의 붕괴라는 정책실패를 감추고 양극화를 정치상품화했다.
이(李) 정부의 정책방향은 분명하다. 자유주의 접근으로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경쟁을 통해 협력을 이룸으로써' 개인과 사회가 모두 발전할 수 있다. 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 간에 균형이 이뤄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형평과 협력을 위해 경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정책과 대비된다. 사회주의적 정책은 종국적으로 가난에 이르게 할 뿐이다. '좌파유산'을 청산하지 않고서 우파적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