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진경시대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성군 정조대왕. 최근 정조 대왕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수도를 수원 화성으로 천도하기 위한 거대한 신도시 건설 계획은 그의 원대한 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꿈이 49세 의문의 죽음으로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여전히 이 시대에 재조명이 한창이다.

예전에 영적인 염사(念寫)를 통해 국보 83호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모델이 선덕여왕이라는 재미있는 가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 교수님이 내게 흥미로운 부탁을 해왔다. 혹시 김홍도가 일본 최고의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가 아니냐는 것.

1794년 5월 에도 극장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 화가 샤라쿠는 충격적이고 개성있는 야쿠샤에를 발표해 단숨에 일본 전역의 주목을 받는다. 마치 요즘 인터넷에 등장하는 연예들의 우스꽝스러운 ‘굴욕 사진’을 연상케 하는 순간포착 화법은 김홍도의 서당도, 씨름도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샤라쿠는 단 10개월여 만에 140점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다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천재화가 샤라쿠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한 학자는 이 사실에 대해 1794년 김홍도가 정조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의 스파이 활동과 비교되는 지도 제작이나 정탐활동을 했으며 그 와중에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토슈사이 샤라쿠’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우키요에를 그렸다고 주장했다.

정조는 일찌감치 문화의 힘을 국정에 기반으로 삼았다. 첨단 기록과 홍보 수단으로 도화서를 육성시켰다. 정조는 김홍도를 총애했다. 김홍도는 풍속화뿐 아니라 초상화, 불화 등 다방면에 출중한 능력을 보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과정을 일일이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기록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책의 감독이 바로 김홍도였다.

정조시대 도화서는 단지 그림만 그린 곳이 아니었다. 국운을 좌우하는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첨병역활을 하고 있었다. 김홍도는 스파이 전력이 있다. 1789년 병으로 죽은 스승 김응환을 대신해 김홍도는 몰래 일본 쓰시마 섬에 들어가 일본 지도를 모사해 정조에게 바쳤다. 정조와 청국과 일본에 대거 스파이를 보내 활발하게 첩보를 얻었던 사실은 정사에 거의 언급되어있지 않다. 최근 정조 드라마에서도 소외되었다.

과연 김홍도가 샤라쿠였을까. 나도 은근히 그러길 바랬지만, 염사 결과 김홍도가 아니었다. 김홍도의 화풍을 충실히 전수 받은 도화서 출신의 조선 스파이거나 혹은 그에게 그림을 배우며 스파이 활동을 도운 일본인 화가였다. 정조가 김홍도를 무척 아꼈기에 더 이상 위험한 적지에 그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정조대왕이 왜 문화를 국정 철학으로 삼았는지 눈여겨봐야한다. 정조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당대 최고의 종교이자 철학인 유불선에 모두 능통했다. 그러나 그는 유불선 어떤 사상도 국정의 전면에 내세우거나 반영하지 않았다. 당주 주류인 유교가 이단시하는 천주교조차 관대하게 수용했다.

그가 중심으로 삼은 것은 특정 이념이 아니었다. 오로지 현실과 백성의 마음이었다. 그가 만약 그 시대 대세인 유교에 집착했다면 첨예한 당파 대결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당파의 이해관계와 철학이 공존하는 속에서 정조가 취한 태도는 바로 포용이었다.

그러나 포용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포용이라는 이념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포용하기 위해선 여타의 잣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예 잣대를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 즉 편견이 없어야한다. 편견이 없기 위해선 자신의 모든 생각을 버려야했다.

정조는 당대 지성들이 목숨걸고 지키려했던 유불선의 신념을 모두 버려야했다. 일찌감치 모든 이념과 종교는 허상임을 간파한 것이다. 법령과 어명으로 임금의 생각을 백성에게 강요하지 않고, 반대로 백성의 마음을 담기위해 모든 것을 비워야만 했던 결과였다.

빈자리에 저절로 채워지는 게 문화다. 문화라는 용광로에 녹여 국정을 조율하고 강한 추진력을 얻었던 것이다. 성군이란 백성의 마음을 담을 수 있게 임금 자신이 꿀단지 같이 애지중지하던 모든 신념을 버린 자라 할 수 있다. 버린 만큼 귀가 열려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큰 군자.

하지만 정조대왕도 실책이 있다. 바로 공사(公私)를 가리지 않은 지나친 ‘용서’였다.

아끼던 신하를 잃지 않기 위해 몸에 부스럼이 날 정도로 용서하고 또 용서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용서받은 자’들의 배신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큰 뜻을 위해서라면 가신(家臣)도 멀리하고 따끔하게 질책하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너무 용서만 했던 것이다.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아무리 오랫동안 정을 쌓은 사이라도 용서는 단 한 번이면 된다. 두 번의 용서는 용서가 아닌 실수인 것이다. 정조는 개인이 아니라 공인임을 앞세워 보다 냉정하게 주변 관리를 했어야 했다.

문화는 정책이 아니다. 문화는 빈자리에 물처럼 스스로 솟아나며 흐르는 것이다. 한 가지 잣대에 사로잡힌 자는 물처럼 흐를 수 없다. 스스로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자만이 문화를 흐르게 할 수 있다. 문화 없는 풍요는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 해도 일순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란 바로 ‘문화’ 리더가 아닐까.(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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