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노파가 20년 동안 참선하는 스님을 정성껏 모셨다.

노파는 어느날 스님의 공부를 시험해보기로 하고 딸을 암자로 보내 스님을 꼭 껴안고 이렇게 물어보게 했다.

"스님,이럴 때 마음이 어떻습니까?"

그러나 스님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말하기를 "마른 나무(枯木)가 차가운 바위에 기대니 한 겨울에 따뜻한 기운이 없도다"라고 했다.

딸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노파는 "내가 20년 동안 이런 속물을 공양했구나"하며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를 불살라 버렸다.

고려 때 진각혜심국사가 엮은 선문염송의 마지막에 나오는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화두다.

노파는 왜 스님을 내쫓았을까.

욕망을 억제하거나 없애 마른나무나 바위처럼 되는 것이 수행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도 일체의 욕망을 단절한 6년간의 고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초기불교와 유식불교,선불교,심리학,철학,생물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이 같은 물음에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오는 1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하공연장에서 밝은사람들연구소(소장 박찬욱)가 '욕망,삶의 동력인가 괴로움의 뿌리인가'를 주제로 마련하는 학술연찬회다.

연구소측은 이들의 발표논문을 주제와 같은 제목의 책으로 엮어 도서출판 운주사에서 미리 출간했다.

먼저 초기불교를 전공한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 교수는 초기불교의 팔리어 경전에 나오는 욕망의 의미를 까마(감각적 욕망),라가(집착적 탐욕),딴하(갈애·喝愛),찬다(의욕)의 네 가지로 구분하면서 "삶의 동력이 되는 욕망과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욕망,개발되어야 하는 욕망과 제거되어야 하는 욕망은 다르다"고 설명한다.

욕망의 다양한 의미와 특징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선불교의 욕망관을 살핀 이덕진 창원전문대 교수는 욕망 속에 있으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는 욕망의 지혜로운 사용을 강조한다.

혜능,임제,마조,대혜 등 선사들의 사상을 고찰하면서 "현대의 욕망에 대한 선불교의 대안은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해결하는 방식"이라며 "선불교는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 속에 있으면서 욕망에 물들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또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욕망의 문제를 고찰한 박찬국 서울대 교수는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주의와 욕망을 해방하려는 쾌락주의의 입장을 살핀 뒤 양자를 넘어서는 입장을 니체의 힘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

니체는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고 욕망에 굴복하지도 않으면서 전체적인 조화 안에서 생동력 넘치는 평온을 유지하는 자가 진정으로 강한 인간,즉 초인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권석만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욕망은 시력이 나쁜 야생마와 같다"고 비유한다.

그는 "욕망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며 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면서 "야생마를 잘 길들여 타고 다니면 인생의 좋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게 되면 고통의 나락에 빠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욕망을 어떻게 조절해 삶에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며 마음을 세심하게 바라보며 욕망이라는 야생마와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생물학자인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진화발생생물학의 입장에서 동물과 인간의 욕망을 비교하면서 "욕망이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에 따라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동물의 욕망보다 못한 고통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책의 편집자이자 연찬회의 좌장을 맡은 김종욱 동국대 교수는 "욕망은 그 주체인 인간이 폐쇄적·분열적·집착적 태도를 고수하냐의 여부에 따라 괴로움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유연하고 중도적인 것"이라며 "문제는 억압과 발산의 중간에서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