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은 암묵적 협조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새로 출발하는 정부에도 허니문은 있다.

진용을 새로 짜고 최소한 착근(着根)할 때까지 우호적으로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 허니문은 없었다.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20%대로 주저앉은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민심이 강퍅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연원은 이 대통령의 취임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실용정신은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합리적 원리이자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는 데에 유효한 실천적 지혜라고 했다.

실용정신으로 계층 간 갈등을 녹이고 강경투쟁을 풀겠다고 했다.

그리고 남북관계 역시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접근하겠다고 했다.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실용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보도(寶刀)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실용은 '시대정신'일 수도,'국정철학'이 될 수도 없다.

그리고 실용은 '결과주의'로 흐를 수 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흥정으로 변질되는 순간 실용은 천박해진다.

원칙이 실종된 '회색지대'를 양산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한,가치를 판단하는 한 '이념'은 늘 필요하다.

현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실용이 결코 이념을 덮을 수는 없다.

국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인내를 갖고 지켜보지 못한 것은,이 대통령의 '이념적 정체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알지 못하는 데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지난 대통령선거의 의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에서의 국민의 선택은 자연인 '이명박'이 아닌,우리사회가 견지해야 할 '이념과 가치'였던 것이다.

이 같은 국민의 선택은 참여정부 실패라는 뼈저린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다.

참여정부가 견지한 좌파적 가치와 이념으로는 한국의 진정한 선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이를 국정철학에 녹여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념과 가치'를 국정의 기초로 삼겠다고 공언했어야 한다.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고 땀과 눈물을 주문했어야 했다.

'스스로 돕는 개인'을 국가가 돕는 자조정신을 고무했어야 했다.

집단의 익명성에 숨지 않는 용기 있는 개인을 국가가 무한히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어야 했다.

'국가개입주의'와 도덕률에 기초한 '설계주의'를 지양하고 개인의 창의와 자율을 최대한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하겠다는 약속을 했어야 했다.

이 대통령은 대처 총리와 레이건 대통령의 보수혁명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보수혁명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자유주의'의 이념과 가치를 신봉하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를 국정운영의 기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대처 총리는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는 평등과 자유를 다 잃지만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는 더 높은 수준의 자유와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기업가를 '우리시대의 영웅'이라고 불렀다.

이들 지도자는 공통적으로 자유를 '도덕의 본질'로 확신했다.

'도덕과 정의'를 통치도구로 삼지 않았다.

특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선진화에 기여한 정부로 남기 위해선 "국가의 흥망성쇠는 제도에 달렸고 제도는 이념과 가치에 달렸다"는 역사발전 법칙을 직시해야 한다.

실용을 벗고 이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이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인기영합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CEO 대통령론'도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인기영합주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