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옵션으로 환변동 위험을 제거할 수 있다는 일부 기업들의 믿음은 '순진한 착각'이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바트화 채권에 투자했던 국내 금융회사들이 환변동 위험을 제거했다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엄청난 위험에 노출돼 있었듯이 국내 수많은 기업들이 통화옵션 상품인 'KIKO(키코ㆍKnock-In Knock-Out)'로 환위험을 회피했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1분기 영업이익을 몇 건의 통화옵션 계약으로 송두리째 날린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중소기업과 통화옵션 계약을 맺은 은행들을 'S기세력(사기세력)'이라고 비난한 사실이 이해될 정도로 환율 상승에 따른 피해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옵션계약 피해로 1분기 헛장사

상장사의 경우 14일까지 1분기 경영실적을 발표해야 하는 '초읽기'에 몰리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통화옵션 손실규모를 속속 실토하고 있다.

두산계열사 두산엔진은 통화옵션으로 환헤지를 시도했다가 2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봤다.

이 영향으로 이 회사 지분 51%를 보유하고 있는 모회사 두산중공업이 1분기에 386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케이엠더블유도 KIKO 계약에서 60억원의 손실이 발생,1분기 영업이익이 102억원에서 순익이 45억원으로 급감했다.

건설기계 제조업체인 에버다임의 경우 영업이익 57억원을 넘는 73억원의 손실을 KIKO 계약에서 입었다.

이 같은 손실규모는 자기자본의 15%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코스닥 등록업체인 제이브이엠은 1분기 영업이익 32억원의 4배가 넘는 136억원의 피해를 신고,1분기 순손실이 무려 102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엠에스 역시 영업이익의 140%가 넘는 180억원의 손해를 입으면서 1분기 16억원 적자라는 참담한 실적을 내놨다.

코스닥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비교적 안전한 선물환 거래를 통해 환헤지를 한 반면 중소기업들은 거래비용이 제로인 KIKO를 많이 선택하면서 코스닥 등록업체의 피해규모가 훨씬 컸다"고 분석했다.

◆청산도 못하고…사면초가

증권업계는 현재의 환율 추세를 감안할 경우 옵션계약을 체결한 기업들의 손실 만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계약의 구조상 기업들의 손실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계약기간 동안 유지될 뿐만 아니라 환율이 급등할수록 손실 규모는 더욱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코스닥 업체 관계자는 "한때 통화옵션 계약의 청산을 검토했으나 현재 환율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일시에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며 "직원들이 피땀 흘려 번 알토란 같은 돈을 눈뜨고 앉아서 잃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확산되는 책임공방

아직까지 통화옵션 계약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다.

대기업의 경우 계약의 위험성을 몰랐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고,중소기업의 경우 주채권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B사 관계자는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은행을 당해낼 수 없다는 분위기"라며 "은행 측에 하소연만 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계약 당시 환율변동폭에 대한 최종 선택권은 은행이 아닌 기업이 행사한 만큼 손실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시장에서는 그러나 일부 중소기업들의 경우 "손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은행 측 말을 무턱대고 믿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정책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심기/안재광/이태훈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