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국내 경제상황 인식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 총재가 10일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발언을 종합해보면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는 커진 반면 물가 불안에 대한 발언 수위는 예전보다 뚜렷하게 낮아졌다.

"물가보다 내수위축이 더 걱정"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처럼 한은도 물가보다 경기 쪽으로 한 발 옮겨간 듯한 분위기다.

채권시장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총재의 발언 이후 '금리 인하가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이 형성되면서 이날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0.12%포인트 급락하며 기준금리(연 5.0%)보다 낮은 연 4.91%에 거래를 마쳤다.

◆더 커진 '경기둔화' 걱정

이 총재는 이날 간담회에서 "국내 경기 상승세가 최근 둔화되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 경기가 둔화될 가능성이 여러 군데서 보인다"며 "경제 성장이 몇 달 전 전망한 것보다 상당폭 둔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과거보다 힘을 줘 '경기 하강 리스크'를 언급한 것이다.

특히 "내수 쪽에서도 그동안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많이 상승했기 때문에 앞으로 소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내수위축 걱정'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 총재는 또 "당초 미국의 금융시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우리나라 실물 쪽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 금융시장 불안이 장기화되면서 앞으로는 우리나라 실물경제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물가 언급은 '원론' 수준

반면 물가 불안에 대한 이 총재의 발언에는 예전에 비해 무게가 덜 실려있다.

"소비자 물가는 당분간 목표 범위(2.5~3.5%)를 웃도는 꽤 높은 상승률이 이어질 것으로 보지만 연말께면 목표 범위 내로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것.이 총재는 또 "원자재 가격이 높은 수준에서 유지돼 세계경기가 둔화된다면 결국은 국제 원자재 가격에도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말해 세계경기 둔화가 국내 물가를 낮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 2월과 3월 금통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에 대해 별도의 언급이 없었다.

이 총재는 또 통화정책의 시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통화정책은 좀 길게 보고 하는 것이며 효과가 나타나려면 시차도 있다"는 것이다.

서철수 대우증권 연구위원은 "경기둔화 걱정과 원론 수준의 물가 발언,통화정책의 시차를 종합하면 결론은 분명하다"며 "당장 다음 달에 금리를 내릴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여차하면 금리를 인하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지표

물론 한은이 당장 5월 금통위부터 금리 인하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금리 인하 여지를 열어놨더라도 현재로선 눈에 보이는 물가 지표가 워낙 안 좋기 때문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9%로 작년 12월 이후 4개월 연속 물가관리 범위 상한선(3.5%)을 웃돌고 있다.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인 생산자물가도 지난달 8.0% 폭등해 9년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는 시점이 한은이 금리 인하에 나설 타이밍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각에선 한은이 이르면 5~6월께 금리 인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특히 새 정부가 총선 이후 과반의석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성장 드라이브를 걸 경우 금리 인하 압박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