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성 시인들이 '새로운 페미니즘'을 담은 시집들을 잇달아 펴내면서 독자와의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대표 주자는 지난해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의 김선우씨를 비롯해 '명랑하라 팜 파탈'의 김이듬씨,'검은 표범 여인'의 문혜진씨,'여왕코끼리의 힘'의 조명씨.이들은 과거의 이분법적 대립구조에서 벗어나 세상을 폭넓게 껴안는 '건강한 페미니즘'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권위에 대해 '경계 허물기'를 하고 있다는 것.김이듬씨는 몽환적인 시어로 '현실과 꿈''삶과 죽음'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는 시 '세이렌의 노래'에서 '더 추워지기 전에 바다로 나와…갑판 가득 매달려 시시덕거리던 연인들/ 물속으로 퐁당/ 물고기들은 몰려들지,조금만 먹어볼래?/ 들리지? 내 목소리,이리 따라와 넘어와 봐'라며 금기의 선을 넘도록 독자들을 유혹한다.

이는 죽음의 영역으로 이끄는 세이렌의 주문인 동시에 인간 스스로 만든 관념의 틀을 깨버리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문혜진씨는 '검은 표범 여인'을 내세워 문명의 틀 안에 갇힌 인간의 야성을 현실 세계로 확장시킨다.

그는 '낯선 여행지에서 어깨에 문신을 한 소년을 따라가 하루 종일 뒹굴고' 싶다가도 '허물을 벗고 스모키 화장을 지우고 발톱을 세워 가터벨트'를 벗어던지고 야생으로 나가기를 원한다.

에로틱한 묘사와 노골적인 신체 표현도 눈길을 끈다.

'오르막길을 달려간다 페달을 돌리면서 살짝살짝 음핵을 비벼주는 게 자전거 타기의 묘미다'(김이듬의 '여드름투성이 안장' 중),'두엄 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문혜진의 '홍어' 중) 등 독자를 '멈칫'하게 만들 정도로 시어가 과감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남성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명씨가 '여왕코끼리의 힘'에서 남편에게는 믿음을,경호원 애인에게는 은밀한 사랑을 주겠지만 그들이 독불장군이 될 땐 만신창이로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그런 예다.

김선우씨는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라며 하찮은 꽃잎 하나에도 모성의 손길을 뻗치는 포용을 보여준다.

때로는 자신의 여성성을 통해 건강한 시적 자아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아가 '난산'(조명),'사냥'(문혜진),'어떤 출산'(김선우)처럼 출산과 낙태 등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시세계로 끌어오는 '영악함'마저 보인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장석주씨는 "최근 여성 시인들이 적극적이고 개척적인 시세계를 보여주는데 이는 우리 문단을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여성 시인들이 아직도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한 평론가는 "누구든 자기 몸을 바탕으로 시를 쓸 수는 있겠지만 일부 여성 시인들의 몸에 대한 집착은 다양한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