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는 '미스터 클린'으로 불리는 대만 정가의 엘리트다.

1950년 홍콩에서 태어나 이듬해 대만으로 건너와 최고 명문인 젠궈고교와 대만대 법학과를 나온 그는 1974년 국민당의 중산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대와 하버드대에서 법학으로 각각 석ㆍ박사 학위를 땄다.

1981년 대만으로 돌아오자마자 총통부 제1국 부국장직(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격)을 맡아 탁월한 영어 구사력으로 장징궈 당시 총통의 영어 통역과 비서로 활동하며 대만 정계에 입문한 그는 43세에 최연소 법무장관 타이틀을 달면서 주목받게 된다.

금권과 폭력으로 얼룩진 대만 정계를 대대적으로 사정하기 위해 폭력조직과의 전쟁을 치르다가 국민당 내 본토 세력과 헤이진(黑金,검은 돈) 비호 의원들의 협공으로 중도 하차했지만 이는 오히려 '미스터 클린'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타이베이 시장을 지내던 2006년 기금 유용 의혹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지만 작년 8월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클린 이미지를 더욱 굳히게 됐다.

그는 '테플론 맨(Teflon-man)'으로도 통한다.

테플론 코팅을 한 프라이팬에는 음식이 눌어붙지 않는 것처럼 부패 스캔들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 별명이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그는 "당선 이후에도 부인이 계속 은행에 출근할 것"이라며 친인척의 이권 개입을 막겠다고 공언해왔다.

1990년대 중반 국립정치대학 법학 교수로 물러나 있을 때 181㎝의 훤칠한 키에 '꽃미남' 외모에 끌린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수업에 참가,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정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건 1998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다.

당시 시장 연임을 노리던 천수이볜 현 총통을 5%포인트 차로 누르며 화려하게 정계로 돌아온 그는 압도적 인기를 바탕으로 2002년엔 64.1%의 표를 얻으며 시장 연임에 성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7ㆍ4ㆍ7 공약(성장률 7%,1인당 소득 4만달러,7대 경제강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그는 6ㆍ3ㆍ3공약(성장률 6%,1인당 소득 3만달러(2016년까지),실업률 3% 이하(2012년까지))를 내거는 등 경제 살리기로 승부수를 띄운 점 때문에 '대만의 이명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한국의 경제성장 경험을 참고해 대만을 이끌어 나가겠다고 밝혀왔다.서울시와 자매 결연을 맺은 타이베이시 시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서울시의 청계천 복원과 버스 전용차선 도입 등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그는 휘발유 가격 통제를 풀어 시장원리에 의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할 만큼 시장을 중시한다.

중국 여행 규제나 투자 제한 철폐 주장 역시 시장원리에 근거한다.

그는 "긴장과 대치 국면의 양안을 번영과 평화의 보루로 만드는 건 대만에 달렸다"며 "대만을 아시아의 쿠바가 아니라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를 친중파로만 보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통일과 독립,무력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3불(3不)을 강조하는 것도 중국을 활용하되 일정 거리는 두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과의 외교를 "서로 부인하는 것도 서로 인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서로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인맥이 넓은 그는 미국과 관계 복원도 노리고 있다.

미국 관료가 대만 관료를 만날 수 없게 한 규제는 중국에 의한 것이라며 이를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미ㆍ중을 놓고 줄타기 외교를 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온화한 언행으로 '샤오마거(小馬哥)'라는 애칭을 얻은 그는 그러나 2006년 천 총통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 사건이 잇따르며 천수이볜 탄핵 정국이 이어질 당시 불분명한 태도를 보여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철인3종경기에 참가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한다.

부인 저우메이칭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