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큰 상(그랑프리나 감독상)을 받게 된다면 그건 임권택·김기덕·홍상수 감독 중 한 명의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유럽 영화 관계자 입에서 나오곤 했다.

이들 감독의 영화가 꾸준히 3대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임 감독은 '취화선'으로 칸영화제에서,김 감독은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다만 홍 감독은 영화마다 꾸준히 영화제에 초청되면서도 수상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다.

올 2월에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밤과 낮'이 초청받아 좋은 평을 들었지만 결국 아무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

그의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또 있다.

홍 감독은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밤과 낮'까지 8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마다 영화적 재미를 느꼈으며,특히 '오! 수정''생활의 발견''해변의 여인''밤과 낮' 등은 어느 정도 흥행력도 갖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한 편도 없다.

지난 2월 말 개봉된 '밤과 낮'은 전국 관객이 1만명도 넘지 못했다.

홍 감독은 자신의 직.간접 경험을 영화로 옮긴다.

그래서 남성 시점으로 진행되는 그만의 리얼리즘 영화를 연출한다.

여자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억척스럽게 밀어붙이는 남자들의 모습이 그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데,그 집요한 모습이 우스우면서 안쓰럽기도 하다.

이런 남성 시점의 이야기 때문에 그는 종종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세를 받긴 하지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여성 관객도 무척 많다.

세 번째 영화인 '오! 수정' 이후 영화부터는 트리트먼트를 중심으로 한 쪽대본 형식(촬영 이전에 시나리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대본이 나오는 형식)의 촬영을 진행한다.

촬영 현장의 아우라와 감독 및 배우의 경험이나 말버릇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의 영화가 가끔 훔쳐보기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배우들의 실제 모습이 영화 속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현장 대본으로 첫 촬영한 '생활의 발견' 땐 영화가 제대로 나올까라는 의구심도 있었지만,그의 이후 영화들은 항상 정교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놀랍다.

1990년대 작가 영화를 주도했던 감독군 가운데 홍 감독은 2000년대 후반 들어서도 계속 진화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다.

그의 다음 영화는 항상 '또 어떤 형식으로,어떤 연출로,어떤 이야기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선사할지 몹시 기다려진다.

그의 다음 영화는 올 여름이나 겨울에 촬영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또 매해 한 편씩은 영화를 연출하겠다고 한다.

"제작비를 줄이라면 더 줄이고 제작비에 맞게 영화를 만들겠다"고 홍 감독은 말한다.

제작비를 줄일지언정 자신이 연출하고자 하는 영화를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항상 적자의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지만 '홍상수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는 기쁜 일이다.

이런 기쁨을 더 많은 관객이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원 영화칼럼니스트 latehop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