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서울대 교수·정치학 >

한동안 '부자 내각'이니 '강부자 내각'이니 하는 말들이 시중에 나돌았다.

이명박 정부의 첫 조각에서 장관들의 재산이 논란이 된 것은 그 정도의 재산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평균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국민적 정서의 일단이기도 하다.

또 그런 비판 속에는 1%의 상위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어떻게 99%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헤아리겠는가 하는 의구심도 있다.

이런 풍조를 어떻게 봐야 할까.

장관은 국회의원과는 다르지만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존재다.

시민 대표성을 빼놓고 정치인의 책무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처럼,이익 대변도 같은 범주의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대머리의 고충을 해결할 발모(發毛) 약을 만드는 사람이 반드시 대머리인 것은 아니다.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반드시 장애인 정치가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로마에서는 노예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며 반란을 일으킨 노예 출신의 스파르타쿠스가 있었으나,하늘은 그를 돕지 않아 십자가형을 받는다.

하지만 19세기 미국에서는 노예 출신도 아닌 정치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예해방을 성취해 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바로 그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부자에 대한 냉소나 혐오,심지어 적대감까지 있다.

임꺽정이나 일지매가 일찍이 의적(義賊)으로 불린 것도 부자들로부터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리라.그렇다면 가난은 좋고,부는 나쁜 것인가.

만일 가난이 좋고,부가 나쁜 것이라면 왜 시중에 '놀부집'은 즐비한데 '흥부집'은 찾아볼 수 없는가.

무소유 정신이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나,모든 사람들이 스님처럼 무소유로 살 수는 없다.

다이어트를 위해 간식으로 머루랑 다래랑 먹을 수는 있겠으나,그것으로 주식을 삼는 청산(靑山)에서는 배가 고파 살기가 힘들다.

또 '개의 철학'을 외친 그리스의 디오게네스처럼 쓰레기통에서 살면서 자신의 절개는 지킬 수 있겠으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노숙자만 양산될 뿐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자에게는 인색함,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질투라는 흠결이 있다고 했다.

부자의 인색함에는 어딘가 속물 냄새가 난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미는 여름 내내 열심히 일해 부를 쌓았으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베짱이를 내쳐 굶어죽게 만든다.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은 것은 좋았으나,그 인색함이 악덕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자가 욕을 먹는 것은 바로 그 인색함 때문이 아닐까.

그 인색함이 너그러움과 베풂으로 바뀔 때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청빈(淸貧)'만이 유일한 도덕적 잣대는 아니다.

가난한 사람의 문제는 질투다.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질투는 자연스러운 측면도 있으나,'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참지 못하는 정도까지 이르면 병이다.

부자가 있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숨통이 트이는 법이다.

부자들이 구두쇠처럼 조기 한 마리만 걸어놓고 밥을 먹는 상황이라면,조기장수는 어떻게 될까.

부자가 아끼지 않고,사흘마다 잔치를 하니 잔치국수가 잘 팔리는 것이고,또 비싼 무공해 쌀을 원하니 그런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덕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는 개미와 진딧물처럼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이 과거와 달리 풍요해졌는데,아직도 부에 대한 철학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제 부자와 빈자는 20 대(對) 80이나 1% 대 99%의 '갈등관계'보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라는 것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