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번 돈 한방에 까먹을라… 귀신도 모르는 환율, 헤지도 어려워"

#1.A조선업체 자금팀장인 B상무.요즘 평소보다 자주 직원들을 불러모아 잔소리를 한다.

'오버하지 말라'는 게 핵심이다.

환율이 예상보다 크게 올라 많은 환차익을 얻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지만 욕심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20년간 외환을 주무르며 터득한 자신만의 속담을 마음 속으로 되뇐다.

"환율은 귀신도 모른다."

#2.C철강업체 국제금융팀.이달 들어 직원들의 퇴근이 두어 시간 늦어졌다.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터에 환율까지 치솟는 바람에 할 일이 많아졌다.

"술먹고 밤 늦게 다니지 말라"는 팀장의 농담조 훈계는 기우다.


아무도 술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긴장의 연속이다.

원화가 예상밖의 약세로 돌아서면서 기업체 외환담당자들이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자칫 하다간 큰 손해를 보거나 큰 이익을 놓칠 수 있는 리스크가 커졌기 때문이다.

장중 환율 출렁임이 커진 것도 부담이다.

투자은행이나 증권회사의 외환딜러라면 한탕 크게 할 수 있는 상황이라 신이 나겠지만,'현상 유지'가 목표인 기업체 외환담당자들에게 요즘은 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허를 찌른 환율

작년 말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2008년 사업계획 수립때 환율을 달러당 900원대 안팎으로 잡았다.

삼성전자는 925원으로 정했고 포스코는 935원을 잣대로 삼았다.

LG전자의 기준환율은 아예 900원대 아래다.

지금과 비교하면 무려 100원 가까이 차이가 나는 셈이다.

SK에너지 관계자는 "유가가 올라 가뜩이나 회사 사정이 어려운데 최근엔 환율까지 급등해 죽을 맛"이라고 했다.

다른 부서 동료들의 시선도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애써 벌어온 걸 너희들이 다 까먹는 거 아냐?" 무심코 던지는 주변 동료들의 농담이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자동차업체 외환관리팀 관계자는 "5000만원짜리 샐러리맨이 하루아침에 수십억원을 까먹으면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처럼 멍해지게 된다"고 푸념했다.


◆엇갈리는 명암

수입과 수출 가운데 어느 쪽 비중이 높으냐에 따라 기업체 외환관리팀의 분위기가 갈린다.

원재료를 수입하는 석유화학업계는 비상이 걸린 상태다.

환율이 지금처럼 수직 상승하면 뾰족한 대책이 없다.

얼마 안 되는 수출대금으로 부족한 달러를 메워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농부의 심정,딱 그짝이다.

삼성토탈 관계자는 "달러화 강세가 지속될 경우 내부 유보금으로 달러를 매입해 수입대금을 결제하는 방안까지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수출로 먹고 사는 기업이라고 해서 마음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대우일렉 자금팀 관계자는 "요즘 환율 그래프만 보면 콧노래가 나오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환율 상승을 빌미로 해외 고정 거래선들이 제품 단가를 깎아달라고 요구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조선업체들은 '대박 운운'하는 주변의 평가가 신경쓰인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선박 수주 대금은 대개 3년에 걸쳐 들어오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환율이 올랐다고 회사에 당장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흐름이 안 보인다

환율이 어디로 튈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기업체 외환담당자들의 걱정거리다.

전자업체 관계자는 "작년 말까지만 해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금융부문의 변수만 챙기면 됐는데 올 들어 미국 실물경기마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환율 움직임을 예단하기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선물환을 통한 헤지 타이밍을 잡는데도 애를 먹는다.

하루 변동폭이 커졌기 때문.철강업체 관계자는 "오전에 헤지를 하느냐,아니면 오후에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상황"이라며 "저녁 무렵 마감을 하고 나면 팀원들 사이에서도 희비가 엇갈린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