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일수록 기술경영의 중요성이 부각돼야 합니다."

지난달 29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기술경영 특별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불황을 극복하는 것은 마케팅이 아니라 기술력"이라며 "장기적인 불황을 한순간의 마케팅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개발로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날 좌담회에는 이정동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 교수,리처드 밀러 미국 올린공대 총장,요시카와 도모미치 일본 와세다대 기술경영 책임교수가 참석했다.사회는 정준석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이 맡았다.


▶정준석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사회)=최근 한국에서도 기술경영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많은 기업들이 경기 불황으로 인해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마케팅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이 시점에서 기술경영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며,기업은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이정동 서울대 교수=기술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은 실증적으로 매출에서 차이가 난다.한국 미국 증시를 분석해도 그렇다.리스크 매니지먼트 중심의 재무 전략에 치중하는 기업들이 많은데 이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그동안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불황을 이긴 기업은 언제나 기술 중심의 인력과 조직을 유지하고 강화한 기업이었다.

▶리처드 밀러 올린공대 총장=경기 불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은 '기업가적 사고'다.불황은 장기적인 사안임에도 단기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데 문제가 있다. 특히 연구개발보다 인재 발굴 작업이 중요하다.아무 것도 갖지 않은 젊은이들이 구글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경기 불황기에 투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기업이 필요하다.기술경영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새로운 제품,기술,생산 방식을 만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피카소가 어떤 물감을 독점적으로 사용해 독창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새로운 가치와 스타일을 창조하는 기업이 되면 된다.

▶요시카와 도모미치 와세다대 교수=공감한다.기술경영에는 두 가지의 혁신 방법이 있다.하나는 선형(linear) 모델이며 다른 하나는 사슬형(chain) 모델이다.선형 모델은 신약 개발 과정처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기술개발이다.반면 사슬형 모델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는 기술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이다.위니아만도의 김치냉장고 '딤채'가 이런 케이스로 아파트에 사는 소비자들이 일반 냉장고의 김치 보관 성능에 불만을 갖는 점에 착안한 '수요 중심 솔루션'이다.

▶사회=신성장 동력 발굴에 있어서 기술경영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교수=기술경영은 새로운 기술적 기회를 탐색하는 데 무척 중요한 수단이다.특히 2가지 이상의 시장이 결합하는 융합(convergence) 분야에서 그렇다.삼성이나 인텔이 연구하고 있는 분야인 바이오 일렉트로닉스의 경우를 보면 '시장'의 관점에서 무엇을 만들고 어떻게 관리할지 알아야 하는 게 우선이다.기술경영은 또 지시-실행(command and control)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는 기업문화를 변화시키고 보유한 인재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기여한다.

▶요시카와 교수=신제품을 만들 때 기술과 경영의 관점을 접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굉장히 차이가 난다.20~30년 전에는 아무도 소비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냥 과학자,엔지니어들이 모여서 연구하고 개발하면 그걸 소비자에게 갖다 주고 시장 반응을 봤다.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지금은 특정 제품을 원하는 목적을 파악한 다음 거기 맞는 소재를 찾거나 만들어서 적용한다.완제품과 최종 산물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밀러 총장=기술경영은 R&D에 대한 지식만 필요한 게 아니라 경영에 대해서도 최고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그런데 지금 교과과정은 서로 분리돼 있다.그러다 보니 관리자들은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새로운 기술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것을 기술적으로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개발을 요청하고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 감을 못 잡는 경우가 많다.반대로 엔지니어들은 소비자와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이들은 소비자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사회=한국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기업에는 마케팅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지식이 존재한다.이를 연결해주는 것이 기술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기술경영의 화두는 '세계화'와 '열린 이노베이션'이다.이를 어떻게 기술경영에 접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요시카와 교수=1975년 전에는 IBM은 굉장히 닫힌 기업이었다.다른 기업과 협업하거나 공동개발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소위 'NIH(Not Invented Here)',여기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였다.하지만 지금은 이들의 전략이 달라졌다.일본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지만 아직 마음 깊이,진짜로 이런 태도를 갖추지는 못한 것 같다.삼성은 해외 MBA 출신자를 적극 채용하는데 좋은 자세라고 본다.

▶밀러 총장=비행기업체 보잉이 변화한 것도 좋은 케이스다.냉전시대에 보잉은 '군수물자 생산 업체'였다.모든 것을 비밀로 유지하려고 했고 직원들은 회사 바깥의 사람들과 잘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이들은 냉전이 풀리면서 민간 부문에 굉장한 비행기 수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태도를 바꿨다.최근에 만든 777 모델은 일본과 아일랜드 등 외부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제작됐다.과거에는 보안 문제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예컨대 소프트웨어를 인터넷으로 다운로드받아 사용하는 것도 이젠 가능해졌다.그 결과 훨씬 빠른 시간에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내놓게 됐다.

▶이 교수='열린 이노베이션'을 흔히 다른 곳에서 개발한 기술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특히 브릭스를 비롯해 남미 동남아 등 소위 이머징 마켓은 우리의 '중급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시장이다.인도의 타타 자동차가 내놓은 저가 자동차는 개도국 시장이 가진 시장 특성을 온전히 반영한 결과다.최고급 기술을 확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쌓아두고 있는 기술을 잘 내보내는 것도 성공적인 열린 이노베이션이다.'BOP(Bottom Of Pyramid)'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런 이머징 마켓이 선진국에 비해 얼마나 큰 시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다만 이 시장은 각종 규제와 정부의 개입으로 투명하지 못하게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이를 극복하려면 역시 인간관계,휴먼 네트워크가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이머징 마켓에 기술을 팔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전문가를 키우고 휴먼 네트워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기술경영을 잘 할 수 있는 인재를 잘 뽑고,잘 키우는 것도 무척 중요한 문제다.

▶밀러 총장=좋은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선별하려면 인재를 뽑을 때 '팀'으로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반드시 봐야 한다.미국의 경우 팀워크나 협업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수학ㆍ과학 성적이 좋은 인력을 엔지니어로 등용한다.이렇게 해서 글로벌 환경에서 제대로 다른 국가의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겠는가.나는 이런 관점에서 좋은 인재의 요건으로 세 가지를 꼽고 있다.△3차원적 사고 △세부적인 부분까지 상상하는 생동감 있는 사고 △충돌,갈등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그것이다.

▶사회=기업이 기껏 연구개발을 마치고도 시장에 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기술경영의 관점이 충분히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어떻게 하면 R&D 성과물이 상품화로,최종 단계까지 연결될 수 있겠는가.

▶이 교수=조급해할 필요는 없다.R&D 투자 결과가 나오려면 5~10년이 걸린다.미래 성장 잠재력 확보를 위해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렇지만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우선 기술과 시장을 묶어두고 괴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또 기술과 관련한 인재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요시카와 교수=공무원에 대한 교육도 기술경영 도입의 중요한 과제다.미국은 시장 지배적인 나라지만 한국은 정부의 역할이 강하고 공공 영역의 힘이 세다.정부 관료들이 기술경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기업에 대한 지원,규제 등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정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