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자가 걸어온 길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는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현대건설 회장을 역임한 데다 재산도 수백억원에 달한다는 점 때문에 "부유한 집에서 걱정없이 살아왔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다간 충격을 받을 정도로 험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지독한 가난 속에 포항죽도 시장에서 좌판을 놓고 노점을 했고 풀빵장수,환경미화원,일용노동자,넝마주이 등 생계를 잇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가난의 긴 터널 속에서 주경야독으로 고학한 끝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이뤘지만 대학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돼 민주화 운동을 하다 징역을 살았다.

졸업 후 취업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에 들어가 중동 건설신화를 일구며 '샐러리맨의 우상'이 됐다.

◆지독했던 가난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목장 노동자인 아버지 이충우씨(포항시 북구 흥해읍 출신,1981년 작고)와 어머니 채태원씨(1964년 작고)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 탓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머니를 도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열심히 공부해 집안을 일으킨다'는 당시 밑바닥 인생들의 꿈은 수재로 인정받았던 둘째 형 상득씨(현 국회 부의장)의 몫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시장통에서 어머니와 함께 김밥 풀빵 뻥튀기 과일 생선 옷감 등을 팔았다.

그럼에도 중학교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에 들어갔다.

3년 내내 전교 1등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끝까지 1등을 했다.

1959년 12월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에 진학한 형 상득씨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은 이태원 판자촌에 단칸방을 얻어놓고 노점상을 했다.

방이 너무 좁아 같이 잘 수 없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달동네 합숙소에 들어가 일용노동자 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가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학시험이라도 한번 쳐보자.시험에 합격만 하면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중퇴학력이 된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불 좀 끄라"는 노동자들의 원성을 들어가며 공부했다.

19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학비를 대줄 사람이 없었다.

형 상득씨가 코오롱 본사에 취직하긴 했지만 그 월급으로는 부모님이 진 빚을 갚는 데도 태부족이었다.

어머니가 행상을 하던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넝마주이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이 때의 고달팠던 기억 때문인지 이명박 당선자는 서울시장 재직 당시 월급의 대부분을 환경미화원들에게 남몰래 기부했다.

대학 3학년 때 상과대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박빙의 승부 끝에 40표 차로 당선됐다.

학생회장으로 '한ㆍ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6ㆍ3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6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됐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샐러리맨의 신화

대학을 졸업했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취직할 수 없었다.

입주 가정교사를 했던 형 상득씨의 도움으로 김세련 당시 한은 총재가 보증을 서줬지만 소용이 없었다.

'해외 건설현장에 나가 일할 역군 모집'이란 신문광고를 보고 당시로선 중소기업인 현대건설에 시험을 쳤다.

여기서도 '운동권'이란 딱지가 문제가 됐다.

필기시험을 치르고 소식을 기다리던 중 '인사부장 면담 요'라고 적힌 전보가 왔다.

인사부장은 "필기시험 성적은 아주 좋은데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곤란하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돌하게도 박정희 당시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현대건설로부터 출근하라는 통보가 왔다.

현대건설에 들어간 그는 한마디로 '신화'를 이뤘다.

입사 5년 만에 이사가 되고,12년 만인 1977년엔 만 35세의 나이로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그 과정에는 그의 지독한 근성과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숱한 일화들이 있었다.

입사한 해 경리사원 자격으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으로 갔다.

워낙 저가에 입찰한 공사여서 적자투성이였고,현장 노동자들의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어느날 한국인 노동자들이 폭도로 돌변해 회사 금고를 공격해왔다.

칼을 들이대는 그들 앞에서 홀로 금고를 안고 지켰다.

이 사건이 정주영 사장의 눈에 띈 첫번째 사건이었다.

이후 태국 공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현장 책임자로 승격됐다.

현대건설 중기사업소 과장으로 근무할 때는 인근에 있던 골재생산 업체인 '공영사'와 분진문제로 말썽이 있었다.

중기와 분진은 상극이었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공영사는 분진 방지시설을 갖추기로 약속해 놓고는 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청와대로부터 골재를 공급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작업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공영사는 오히려 "청와대에서 시키면 그만이지,현대와의 약속이 무슨 소용이오"라고 윽박질렀다.

이명박은 여섯 시간의 말미를 주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공장을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경고했다.

다음 날 아침,이명박은 직접 불도저를 몰고 공영사로 향했다.

트럭이 드나드는 공영사 진입로를 불도저로 깊숙하게 파버렸다.

도로를 사실상 봉쇄해버린 것이다.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지만 "공영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고속도로 공사를 못하게 생겼다"며 공영사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청와대의 힘을 믿고 버티던 공영사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장이 된 후에도 그는 위험과 도전을 즐겼다.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휘젓고 다니며 대형 공사를 잇달아 따냈다.

1980년대 신군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투자조정' 정책은 현대그룹에 닥친 최대 위기 중 하나였다.

정책의 핵심은 현대,대우 아세아자동차를 하나로 통합하고 옥포조선과 현대중공업,현대양행을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국보위는 현대에 발전설비를 맡길테니 자동차는 포기하라고 했다.

국보위의 압력에 정주영 회장은 회사 도장을 이명박에게 넘기고 발을 뺐다.

국보위에 불려간 이명박은 끝까지 버텼다.

경쟁 구조는 시장경제의 원리이자 원동력이라는 논리를 끝까지 꺾지 않았다고 한다.

한밤중에 돌아간 현대사옥에는 정 회장이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탄치 않은 정치

1992년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사람은 김영삼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다.

전국구 의원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정 회장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2002년 7월 민선 3기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다시 정치판으로 복귀했다.

기업에서 배운 경영마인드를 공공행정에 도입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청계천 복원사업은 이제 서울의 자랑거리로 변모해 이명박 당선자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남았다.

'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의혹'은 선거 막판까지 이 당선자를 괴롭혔고,아이들 진학을 위해 했던 위장전입,자식들을 자신 소유의 빌딩 관리회사에 위장취업시킨 것 등이 내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


< 이명박 당선자 프로필 >

▶1941년 12월19일 일본 오사카 출생

▶1954년 포항 영흥초등학교 졸업

▶1957년 포항중 졸업,1960년 동지상고(야간) 졸업

▶1965년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1965년 현대건설 입사(공채)

▶1970년 12월19일 김윤옥씨와 결혼

▶1977~88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78년 인천제철 대표이사ㆍ한국도시개발(현 현대산업개발) 사장 겸임

▶1982년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겸임,1988~92년 현대건설 회장

▶1992~95년 14대 국회의원(민자당 전국구)

▶1992~94년 6ㆍ3 동지회장,1996~98년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 종로)

▶2000년~현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2002~2006년 32대 서울시장,2007년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

▶본관;경주, 종교;기독교,병역;면제(입소 후 의병 퇴소), 혈액형;B형, 별명;컴도저(컴퓨터+불도저), 취미;테니스 수영, 자녀;1남3녀, 학위;고려대 경영학사,서강대 명예경영학박사,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 명예박사,몽골국립대 명예경제학박사,목포대 명예경제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