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은행 확인보다 예금자 철저한 관리 우선"

예금자가 통장과 인감을 도둑맞은 데다 비밀번호까지 쉽게 노출된 경우 절도범이 예금을 인출했어도 은행에 확인 소홀로 인한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은행에 `부정 인출' 확인 의무를 지우려면 의심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런 사정이 없는 상태에서 통장ㆍ인감이 있고 비밀번호까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내 준 것은 잘못이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A씨가 "예금주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통장절취범에게 내준 예금을 달라"며 B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1일 밝혔다.

A씨는 2000년 B은행 순천지점에 계좌를 개설, 2005년 2월까지 6천429만여원을 예금했다.

그런데 2005년 2월22일 오전 11시40분께 절도범 3명이 집에 침입해 통장과 인감을 훔쳤다.

통장 비밀번호는 비교적 단순한 집 전화번호 끝 네자리였는데, 절도범들은 번호를 금세 알아냈다.

일당은 당일 낮 12시49분께 B은행 남원지점에서 2천500만원을, 오후 1시48분께 전주 모 지점에서 2천만원을, 오후 2시19분에 전주 모 지점에서 1천900만원 등 총 6천400만원을 인출했다.

A씨는 이튿날 오전에야 이를 알게 됐지만 돈을 못 찾았고, 결국 소송을 냈다.

항소심은 첫번째 인출에서 통장과 인감, 예금지급청구서에 하자가 없었던 점 등을 들어 예금 인출자를 의심할 사정이 없었지만, 나머지 인출은 통장개설 지점이나 첫번째 인출 지점과 전혀 다른 곳에서 짧은 시간에 연속해 이뤄진 점을 들어 은행측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두번째ㆍ세번째 인출도 통장과 청구서에 하자가 없었고 진정한 인감이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비밀번호까지 일치했으므로 약관과 금융거래 관행에 비춰볼 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예금 지급은 유효하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은행 직원이 인감 대조 및 비밀번호 확인 등 통상적 조사 외에 신원확인이나 예금주 연락 등의 방법으로 조사할 주의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려면 예금지급 청구자에게 의심을 가질 만한 특별한 사정이 인정돼야 하나, 이 사건에서 특별한 사정이 존재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금융거래 관행이 대량 사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예금인출의 편리성도 고려된 점, 비밀번호까지 일치할 경우 의심을 갖기는 어려운 점, 금융기관에 추가확인 의무를 부과하는 것보다는 예금자에게 비밀번호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사회전체적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점 등을 참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z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