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 哲 鎬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

40대 초에 처음 주례 부탁을 받고는 질겁하면서 내가 무슨 자격이 있느냐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런데 거절당한 근로자가 결국 예식장 전속 유료 주례를 통해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울산에는 고향을 떠나와 주례를 구하기 힘든 결혼적령기의 근로자가 많았다. 훌륭한 인격자로서가 아니라 고문 변호사로서,인생 선배로서 주례를 서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한번 시작하자 끝도 없었다. 10여년 동안 1000건에 이르는 주례를 맡게 되었다. 초기의 주례사에는 이런 내용을 담았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에는 끝까지 대화해라. 대화해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에는 한쪽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양보해야 될지 끝까지 모를 때에는…,신부 쪽에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 신부 쪽의 일방적 양보 혹은 여필종부를 강조하던 윗세대 주례분들보다는 다소 진보적인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때의 민법 조항도 미성년자인 자식에 대한 친권은 부부가 공동으로 행사하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남편이 행사하라는 식으로 남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 주례사가 너무 가부장적이라고 여성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이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1990년 초에 민법마저 바뀌었다.

친권행사에 있어 부부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법원의 결정에 따르라는 식이었다.그렇다면 부부가 살다가 의견충돌이 생겨 해결이 안 될 때마다 법원에 가서 물어보라고 충고하라는 말인가. 고민하다가 주례사 내용을 이렇게 바꿨다.

"…그런데 양보를 누가 해야 할지 끝까지 모를 때에는…,자기가 입장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에서(혹은 양보를 해도 상처를 덜 입겠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양보해라. 그러나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에는 먼젓번에 양보받은 쪽에서 양보함으로써 품앗이를 하는 것이 좋겠다."

세월이 흘러갔고 위 주례사는 반복됐다. 그러면서 고민도 깊어졌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자꾸만 높아지더니 급기야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혹시 내 어정쩡한 태도가 이혼율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화란 어느 한쪽에 힘을 더 실어줄 때라야 가능한 불균형적 균형상태가 아닐까.

지난 주말 오랜만에 주례를 섰다. 자신이 없어 몇 년 동안 주례를 사양해 왔는데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고심을 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한번 신혼부부의 건강한 상식에 문제 해결을 위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앞선 주례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내 주례사를 이렇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가 양보해야 할지 끝까지 모를 때에는…,그때는 신랑 쪽에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