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서 고양문화재단 대표(69)의 이력에서 '예술'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호주 멜버른대학 조교수,국제경제연구원 연구실장,삼성전자 부사장,삼성석유화학 사장,고합 대표이사 회장 등 경제학자와 경영인 경력만 즐비하다.

하지만 그것은 외면상의 이력일 뿐이다.

전국 고등학생 음악 콩쿠르에서 테너 솔리스트로 1등 없는 2등상 수상,한국남성합창단 설립,음반 발매,가곡 작곡….사실상 성악가 수준의 '예술 이력'을 함께 지녔다.

그래서 지난 1월 그가 고양문화재단 대표로 취임했을 때 지인들은 '갈 자리에 갔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예술인보다는 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양문화재단은 2004년부터 어울림누리극장을 운영해오다 지난 5월 일산 정발산역 근처에 아람누리극장을 개관했다.

특히 아람누리극장은 1449석의 음악당과 1887석의 오페라극장,300여석의 실험극장,미술관 등을 갖춘 종합 예술공간이다.

지난달 30일 고양아람누리극장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고양아람누리극장 개관 2개월

-아람누리극장을 개관한 지 두 달이 돼 갑니다.

지역사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개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지요.

처음에는 집 앞 하수처리도 제대로 안 되는데 무슨 공연장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괜찮은 공연을 올리며 언론에서 크게 다루는 것을 보고 지역 시민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어요.

공연만 예술이냐며 반대하던 다른 분야 예술인들도 우선 시민들의 문화적 소양 자체를 키워야 한다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고요."

-지역민들이 반발했던 것은 공연장이 지역에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느냐는 의문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좋은 도시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일자리가 많아야 하고 문화,예술 등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어야 하지요.

사람들은 후자를 삶의 질로는 연결시키지만 고용 확대까지 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 대형 기업들을 보면 IT(정보기술) 산업의 발전으로 지역적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장소는 좀 더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런 곳입니다.

한 시간에 고무신을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만큼 기업이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느냐가 관건입니다.

84만명에 불과한 고양시 인구에 비해 아람누리와 어울림누리를 합해 총 6000석의 규모의 극장은 너무 크다는 평가가 있지만 창조적 기업을 끌어들이려면 그만큼 도시의 문화적 수준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람누리나 어울림누리만의 독보적인 콘텐츠가 있습니까.

"이 일을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극장의 자체 제작 공연을 늘리는 것입니다.

현재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것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방법의 자체 제작이죠.오페라부터 오케스트라까지 극장 소속의 수준 있는 단체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새로운 실험의 전위예술 공연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야 서울이나 다른 지역 관객들을 고양으로 오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지역시민 반응 뜨거워

-서울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거리감부터 좁혀야 할 텐데요.

"저는 매일 용인에서 고양으로 출퇴근합니다.

교통 체증이 있는 출근 시간에도 한 시간이면 옵니다.

우선은 한 번이라도 극장에 와서 보고 '별로 멀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우리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을 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디지털 퍼포먼스 '신타지아'를 만든 것도 그런 의미에서인가요.

('신타지아'는 고양문화재단과 KAIST가 공동 제작해 지난달 23일 올린 디지털 공연이다.

무용수가 가상공간의 캐릭터와 춤을 추고,관객이 휴대폰으로 참여해야 공연이 완성된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그런 셈이지요.

사실 이 같은 공연으로 수익을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대예술이 갖는 표현 능력의 한계를 깨고 싶었어요.

영화보다 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선 이런 시도가 필요합니다."

-일에 대한 의욕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요.

"저는 1970~1980년대 개발 시대를 살아온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저지르고,시작하고 보는 세대라고 할까요.

뉴코리안들은 사실 이런 리듬에 잘 맞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방법이 실수는 많아도 뭔가(결과물이) 나오긴 나옵니다."

-지난달 28일부터 아람누리극장에서 마지막 개관예술제 행사로 러시아 스타니슬라프스키 오페라단 초청 공연을 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공연 단체를 데려 오려면 적어도 1년 전부터 공을 들여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단기간에 세계적인 공연단체를 초청하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지요.

지금은 유럽에서 공연 시즌이 끝나 단원들이 휴가갈 때입니다.

그것을 이용해 한국에서 일주일만 더 일하고 가라고 설득한 거죠.그렇게 각국의 극장들에 제안을 했는데 그중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받아들였습니다."

#러시아 스타니슬라프스키 오페라단 초청

-유명 공연단체라고 무조건 초청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람누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부합하는 부분이 있었습니까.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은 실험정신이 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매끈하고 정통적인 형식의 공연을 보려면 이탈리아로 가고 거칠고 창조적인 것을 보려면 러시아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그러면서도 원작의 의도을 꿰뚫고 있어서 우리 극장의 롤모델로 삼을 만했습니다."

-임기 동안 목표로 삼은 것이 있습니까.

"1년 동안 공연 1000개를 올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5개 공연장에 총 6000석 규모이면 연 200개 공연 정도면 된다고들 합니다.

제가 1000개를 올린다는 것은 자그마한 무료 낮공연부터 재즈,시낭송회 등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작은 공연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 센터에는 1년에 3000개의 공연이 올라갑니다.

1000개 달성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 박웅서 대표는…

△1938년 평안북도 출생
△1957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1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1961~1969년 한국은행 Economist
△1970~1978년 호주 멜버른대 조교수
△1978~1981년 국제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및 연구실장
△1982~1983년 한국산업경제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및 연구실장
△1983~1984년 삼성그룹 회장고문
△1984~1985년 삼성전자 부사장
△1985~1989년 삼성물산 부사장
△1990~1996년 삼성석유화학 사장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1999~2000년 ㈜고합 대표이사 회장
△2001~2003년 세종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