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산업혁명과 그 경과는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했다"고 말한 사람은 유나바머라고 불렸던 시어도 카진스키다.

하버드대 수학 천재였고 버클리대학 교수를 지낸 사람.A4용지 50여장에 이르는 '산업사회의 미래'라는 제목의 선언서가 그의 작품이다.

18년 동안 대학과 항공사에 폭발물을 보내면서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테러리스트.조승희같은 어린 추종자를 만들어낸 악(惡) 지식의 숭배자다.

기술사회가 초래하는 인간 소외와 조직사회의 병폐, 인간 자신과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환경 재앙,언론을 포함한 기성 정치의 질식할 듯한 구조, 유전 공학과 통제 기술이 만들어 내는 기계에 대한 종속, 이 모든 것들에 그는 저주를 퍼부었다.

과격 테러 분자 이야기를 또 꺼내느냐고? 아니다.

한국의 교과서 이야기다.

'법과 사회' '국사' '윤리' '지구 과학' 등 교과서의 상당수는 인류보다는 민족, 문명보다는 자연, 진보 아닌 퇴보를 가르치고 주입하는 데 바쳐져 있다고 할 정도다.

심지어 "동양은 정신,서양은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이르면 아연실색이다.

문명사회를 규정하는 가치들 중 과연 어떤 것이 동양에서 왔다는 것인지부터가 궁금하다.

민주주의와 시장,양성 평등과 노동자의 권리,복지 제도와 인권,시민 사회와 개인의 가치 등 우리의 사회적 삶을 의탁하는 정신의 구조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가? 정답은 "서양에서 왔다"라고? 그것도 틀렸다.

이 가치들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산물이다.

네 것 내 것이 아닌 인류 공통의 자산이다.

동서양을 제멋대로 편갈이 하고 인류의 보편사적 진보를 원천 부정하는 근거없는 주장들이 교과서를 채우고 있다.

"물질 문명에 지친 서구 사회가 최근 들어 동양의 정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주장(고교 전통윤리 19쪽)에 이르면 아예 책을 덮어야 할 정도다.

이들에게 물질은 더러운 것이고 문명은 부끄러운 것이다. 경제 교과서가 부자를 적대시하고 경제 아닌 정치 슬로건을 가르친다는 비판은 있어왔지만 어쩌다 대부분 교과서들이 반지성이며, 반문명적 내용들로 채워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전통윤리' 교과서는 심지어 풍수지리까지 매우 그럴 듯한 사상체계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대학가에조차 점(占) 집이 많은 것을 교과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정도다.

문명을 저주한 카진스키 선언문을 다시 3류 통속소설로 만든 수준이요 논란이 많았던 경제교과서는 차라리 낫다고 말해야 할 정도다.

환경 분야나 지구 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문명은 악이며, 인간 곧 환경 파괴범'이라는 종말론적 이데올로기의 전파자가 되고 있다.

급진 운동가들의 팸플릿과 다를 것이 없다.

반기업 반시장 반문명 정서는 이렇게 공교육을 통해 대량 생산, 대량 보급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을 저들은 또 진보라고 부르고 있으니 참으로 가관이다.

반문명 행동주의가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은 환경운동이다.

교과서는 환경을 문명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태주의적 방법에 의해서만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

한마디로 사람의 생산 활동 자체가 죄악이라는 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강물이 깨끗한 것을 본 적이 없다.

가난한 나라의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을 본 적도 없다.

"GDP의 40% 정도를 까먹더라도 일체의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대학교수가 국영 KBS 라디오의 버젓한 고정출연자가 되어있는 나라다.

이들은 GDP 40%가 아닌 불과 4%의 삭감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어떻게 파괴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자신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땀흘려 쌓아 올린 토대 위에서 한가한 이념의 굿판을 벌이는 것에 불과하다.

좌파 정부 10년 동안 교과서는 그렇게 바뀌어왔다.

오늘의 교과서들은 문명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일체의 경제행위에 죄의식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죄의식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의 원천이다.

그것도 사이비 종말론이다.

교육부는 지금 내신문제를 놓고 대학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부모들은 학교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