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盈敎 < 동국대 총장 youngfive@dongguk.edu >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경험을 이따금 한다.

같은 언어로 얘기를 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면 이는 무슨 까닭인가.

말하는 사람의 잘못일 수도 있고 듣는 사람의 잘못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잘못들은 수사법에 익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게 아니고 마음속의 진심을 가리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

진심을 이야기하고 정확하게 듣는 자세는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태도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이해의 조정은 물론 사회를 지탱하는 건강한 관계의 구조가 허물어진다.

노사문제의 본질도 여기에 있고,파탄 지경에 이르는 우리 토론문화의 안쓰러운 모습도 필경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조직 내에 비민주적이니 독단적이니 하는 수식어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면 그만큼 불신의 골이 깊다는 증거다.

모름지기 한 사회의 의사소통이 건전하게 이루어지려면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며,상대방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근기(根機) 차이가 나면 어쩔 수 없고,상대방을 믿지 못해 의심하기 시작하면 진심이 왜곡되기 쉽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아도 답답한 사람이 있는 반면 어쩌다가 한 번을 봐도 마음 환해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매우 희귀해서 그 존재 자체가 축복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미소 지으시니 제자인 가섭이 미소로 답했다는 이심전심의 경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염화시중의 미소로 뜻이 소통되는 사회라면 달리 무엇을 더 바랄까.

모든 사람이 상근기(上根機)의 소유자이자 진화한 영혼의 주인이므로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이 몸 전체에서 우러날 것이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보다 자세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어떤 사람이던가.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서 잘 듣고,진심으로 이해해주며,다른 사람을 위해 기쁨을 만들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또한 인생이 막막하고 답답할 때,내 옆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기다리는 그런 사람일 터이다.

일러 '내 마음의 한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내 마음의 한 사람'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용기와 힘이 샘솟는 그런 사람이다.

여러 사람이 한결같이 지목하는 '내 마음의 한 사람'보다 서로 다르게 추천하는 '내 마음의 한 사람'이 훨씬 소중하다.

요컨대 다수의,다수에 의한,다수를 위한 '내 마음의 한 사람'이 많을수록 조직이나 사회는 밝고 건강해진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말만 앞세우면 구두선에 그치지만,조용히 행동에 옮긴다면 선업이 된다.

오늘 아침부터,지금 이 순간부터라도,누군가를 위한'한 사람'이 되어보자.이것이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위한 진정한 의사소통의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