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반포동 이수그룹 본사에 있는 김준성 명예회장 집무실을 들어서면 책이 빼곡한 서고부터 눈에 들어온다.

부총리 출신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소설가라는 느낌이 먼저 들 정도로 그의 집무실은 책향기가 가득하다.

그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수(米壽·88세)를 맞는 소회 등을 담담하게 밝혔다.

그러나 화제가 경제문제로 넘어가면 재계 원로의 눈빛은 사뭇 달라졌다.

반세기 이상 경제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온 그는 3시간여에 걸쳐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그에 대한 고언과 대안들을 차분하게 제시했다.

인터뷰 내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정확한 경제 수치를 제시하는 김 명예회장의 힘 있는 논리는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차기 정부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한국경제의 문제점과 대안을 담은 실용 경제서적을 집필 중이라고 말했다.

◆만난사람=김상철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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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미수를 축하드립니다.

사회·경제계 원로로서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대해 하실 말씀이 많으실 텐데요.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얘기죠.(웃음) 문학도 하고 관료 생활도 해봤지만,저는 기업을 하면서 실물 경제를 오랫동안 접해온 사람입니다.

지난해부터 '경제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망하느냐,흥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책도 냈습니다."

-정부의 진단과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다른 것 같은데.

"제가 부총리를 맡고 있을 때,물가가 30%까지 오른 적이 있었죠.아주 힘든 때였죠.최근 상황이 (어렵다는 점에서) 그때와 비슷하지 않나 느낍니다.

요즘 관료들이 경제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인식 자체가 더 큰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위기 불감증이죠.바로 이런 게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데…."

-경제위기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올해 1분기 경상수지가 적자예요.

과거에는 분기마다 50억달러씩 흑자가 났는데,올 1분기는 손익분기점 밑으로 떨어졌어요.

상품 수출은 웬만큼 했지만 관광,서비스산업 등에서 30억달러씩 적자가 났죠.한 60억달러는 까먹은 셈이에요.

이대로 가면 무역수지 전체가 적자가 날 수도 있어요.

앞으로 수출 안 되고 적자 나면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정부가 발표하고 있는 물가지수를 보면 10년 동안 계속 안정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음식값,호텔비,골프 비용은 세계에서 제일 비싸요.

이런 부분은 물가지수에 안 잡히거든.골프를 예로 들죠.일본에서는 100달러면 되는데 우리나라는 배 수준이죠."

-관광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이 취약한 이유가 뭡니까.

"우선 세금 때문입니다.

정부가 큰 정부이다보니 세금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죠.일본 미국 등보다 높은 세금으로 인해 살인적인 서비스 물가가 형성된 것입니다.

고임금 탓도 있죠.10년 동안 물가는 30% 올랐는데 임금은 배 이상 올랐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음식값,호텔비 등을 내야 하는 처지에 몰렸습니다.

결국 고세금,고임금이 서비스산업을 망친 셈입니다."

-오랜 과제인 수출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출은 중소기업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대기업 위주로 뚫을 수밖에 없어요.

대만은 중소기업 위주의 수출 구조지만,우리는 다르죠.대만은 예전부터 원료나 양식도 풍부한 데다,많은 자금이 있었습니다.

중소기업만으로도 경쟁이 됐죠.우리는 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죠.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 10대 대기업 중 6개 기업이 차지하는 수출 비중이 56%라는 점입니다.

5~6개의 대기업이 나라의 수출을 좌지우지하는 것이죠.그것도 자동차,반도체,조선 등 6개 품목에 국한돼 있습니다.

이 같은 경제구조 때문에 성장했지만,이젠 이같은 특성 때문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기업들이 수출 업종을 개발하고 시장을 확대해야 합니다."

#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어야

-기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가장 문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기업환경보다는 글로벌 경쟁이 심화된 게 가장 문제입니다.

경영 자체가 생존 경쟁이 됐으니까요.

특히 중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우리나라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죠.일본 경제도 다시 회복기에 들어서지 않았습니까."

-요즘 회자되는 '샌드위치 위기론'을 말씀하시나요.

"선진국과는 기술 경쟁을 해야 하고,후진국하고는 가격 경쟁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중국은 우리의 주종목인 반도체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일본은 기술을 앞세워 저만치 달려 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중국 인도 베트남 등으로 공장을 옮겨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으니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요.

일본의 질주와 중국의 추격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기업이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 제조업 공동화 문제도 심각합니다.

"국내 대기업들이 외국에다 공장을 짓는 일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미국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도 그랬고요.

규제 등 복잡한 국내 상황을 고려하면 막을 수 없죠.결국은 나가는 기업은 내보내고,그 빈자리에 외국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특히 한국의 기술,임금 등의 여건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다국적 기업들을 정부가 나서서 유치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외국 기업에 배타적인 정책이 국내 기업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지만,이제는 그와 같은 정책이 오히려 국내 제조업 공동화 현상을 부채질하는 역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닉스반도체 공장 증설을 계기로 정부의 수도권 규제 정책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역대 모든 정부가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죠.수도권 집중을 막자는 정책은 기본적으로 옳은 정책입니다. 하지만 융통성이 없다는 게 문제죠.예를 들어 반도체 공장의 경우에는 개별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설을 이중으로 투자하지 않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예외적인 법 적용이 필요하다는 거죠.국가 중추산업의 글로벌 경쟁력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지방산업단지의 경우 기업 유치가 어렵습니다.

"중소기업을 위한 지방산업단지 육성도 신경써야죠.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들이 지방에서 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중소기업 전용 지방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자금을 모으고,대기업이 연구자금을 내면 되죠.지방자치단체가 토지를 저렴하게 출연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동기 부여가 필요해요."

#기관투자가 지분 높여 지배구조 안정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과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이제 기업과 정치권의 결탁도 없고,글로벌 수준의 기업 투명성도 확보됐습니다. 다만 기업 소유 문제가 남아 있죠.하지만 오너 경영의 혜택도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 반도체산업이 우리나라에 지게 된 원인을 따져보세요. 장기적인 안목이 부족해서 우리나라한테 추월당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너를 중심으로 장기적 관점의 경영을 통해 투자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대기업의 지배구조도 나중에 바뀔 것입니다. 창업주의 손자 정도까지는 이어질 수 있겠죠."

-기업 경영과 지배구조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기관투자가 중심의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 기업은 대부분 기관투자가의 지분이 40~50% 정도죠.우리는 18~20%에 불과해요. 적어도 30%는 돼야죠.이를 위해서는 70조원가량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요. 우리나라의 부동자금이 총 550조원 정도인데,이 돈의 일부를 흡수해 기관투자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3년 동안 1년에 20조원씩 마련하면 되죠.정부가 기관투자가 확대를 위해 이런 투자자금에 대해서는 비(非)실명제를 허용해주는 방안도 검토할 만합니다."

-반(反)기업 정서 해소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외국 사람들은 반기업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반기업 정서는 반재벌 정서죠.너무 기업과 기업인만 심하게 다루면 기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배려와 용서가 필요하죠.어쨌든 반기업 정서 해결을 위해서는 대기업들이 우리의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기업들도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투명경영을 하고 사회공헌도 해야죠.특히 기업뿐 아니라 정부,국민들도 함께 마음을 합쳐 친기업 정서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재계 2,3세들이 본격적인 경영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후배 기업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오래 살면서 보니,위기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잘 되는 기업도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한순간에라도 망할 수 있으니까요. 일본의 도요타는 호황기에도 항상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 이를 생산성 향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이런 점을 배워야 해요. 끝없는 위기의식과 문제의식이 중요합니다."

#비실명제 부활 등 시장 기능 회복시켜야

-최근 주식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주식시장이 기업의 자본 조달 창구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돈만 왔다갔다 하는 곳이 됐죠.앞에서도 말했지만 기관투자가가 늘어나야 기업을 위한 주식시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연금으로 하여금 기관투자가 노릇을 맡기려 하고 있는데,한계가 있죠."

-환율 문제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러게요. 원화가치가 엔화보다 높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환율이 10%만 떨어져도 수출이 10%는 더 좋아질 텐데.이제 큰 틀에서 문제를 살펴야 합니다. 하드웨어 말고,소프트웨어에 대한 대처를 해야죠."

-시장 기능 회복을 위한 방안이 없을까요.

"요즘 시장 기능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550조원에 달하는 부동자금 때문이죠.정부가 나서서 처리해야 합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죠.부동자금 해결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동자금 550조원에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친 금액이죠.외환위기 이후 외화가 없으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그 돈을 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대하는 데 쓰도록 도와줘야죠.예를 들어 석유개발 등 대형 프로젝트에 정부가 앞장서면서 기업들의 자금 문제도 함께 해결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관료들의 위기 불감증이 가장 큰 문제

-5공화국 때는 부총리도 하셨는데요. 후배 경제 관료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경제 관료는 전문직이죠.정권이 바뀐다고 관료 문화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지만,규제로 인해 관료들이 많이 비난받고 있죠.차기 정부에서는 정말 규제부터 없애야 합니다. 과거 경제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요. 총리실에서 규제 관련 회의를 한다고 해서 들어가 보니,없앨 게 한 수백 가지는 되더라고요. 그런데 정권이 끝날 무렵에는 오히려 규제가 더 늘어났어요. 기가 막혔죠.규제라는 게 그래요. 시장 기능을 규제하기 위한 것들이 시장을 혼란스럽게 할 때가 많죠."

-노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진국 어느 나라를 가보더라도 우리나라 같은 나라는 없어요. 현대자동차는 아마 10년은 더 노조 때문에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현대차 노조가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나라 노조가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이제 투쟁으로 해결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기업도 바뀌어야죠.투명경영을 통해 노조를 이해시키고 이익을 내 재투자를 해야죠.그 다음에 배당도 주고 월급도 주고 하는 겁니다. 노사가 서로를 위해 협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잘 조율해야죠."

-한국 경제를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의 불씨를 놓으면 안 됩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우리는 민족성 자체가 위기 극복에 탁월하죠.다만 정확한 위기의식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차기 정권에서는 어려운 경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