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塋允 <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2·13 합의 조치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열린 제13차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합의에는 우리 정부의 고심이 크게 묻어나 있다.

40만t에 달하는 쌀 지원은 북한의 2·13 초기이행 조치에 말미라도 주려는 듯 꽤 멀찌감치 5월 말로 잡아 놓았다.

그러나 지금부터 1년 전 추진 바로 직전에 무산됐던 경의선·동해선 철도시험운행은 쌀 지원보다 앞선 5월17일로 해놨다.

이로써 쌀과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이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일단 북한의 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늦어도 5월 말까지는 초기 이행조치가 취해져야 하며,경공업 원자재를 받기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열차 시험운행에 응해야 한다.

2·13 초기 이행조치가 취해진다면 6월부터 시작될 경공업 원자재 제공은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부담이 없다.

열차시험 운행과 관련해 군사적 보장조치를 명시적으로는 얻어내지 못했지만,이로 인해 열차 운행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경공업 원자재가 북측으로 갈리가 없다.

쌀과 2·13 합의를 연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지만 합의문에도 밝혔듯이 쌀은 인도적 차원에서 차관(借款) 형태로 추진되면서도 시간적으로는 초기이행 조치라는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현재 북한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북한의 행동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그렇게 타박할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만약 북한이 초기 이행조치를 5월 말까지라도 취하지 않는다면,쌀을 얻지 못함은 물론 어떤 비난과 압력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가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어쩜 초기 이행조치와 그 이후에 올 변화를 크게 우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초기 이행조치와 함께 쌀과 경공업 원자재를 공급받겠지만 그 대신 그들 체제수호의 마지막 보루(堡壘)라고 할 수 있는 군사적 동결 조치를 풀어야 한다.

열차 운행에 대한 군사적 보장 조치란 뒤집어 말하면 열차 운행에 따라 안게 될 북한 체제에 대한 군사차원의 훼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공업 원자재를 남한으로부터 받으면 그 반대급부로 북한은 지하자원의 공동개발을 위해 정부차원의 빗장을 풀어야 한다.

지하자원 개발을 위한 공동정밀 조사가 그것이다.

이 또한 북한체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어렵게 만들었던 남북 간의 통행·통관 문제도 개성공단 등을 위해 크게 완화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는 제13차 경추위 합의에 명시된 내용이다.

남북 간 열차 시험운행 다음은 다름 아닌 열차개통이다.

남북 간 일회성 열차 운행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계속적인 경공업 원자재 공급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는 열차개통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열차 시험운행으로 북한이 안게 될 고민은 열차 시험운행 이후 개통으로 이어져야 할 내부 개방과 그에 따른 부정적 파급효과일 것이다.

군사적 보장 문제는 오히려 핑계일 수도 있다.

개성공단에 하루 수백대의 차량이 드나들고,금강산으로는 오늘도 수천명이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다.

군사적 보장이 단지 일회성에 지나지 않을 열차 시험운행에만 그렇게 민감하게 작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북한이 북·미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는 그럴지 모르나,2·13합의를 받아들이려는 상황에서는 전혀 다르다.

핵문제가 해결돼 가는 과정에서 북한의 개방은 불문가지다.

북한은 이미 앞으로 다가올 상황,벌거벗은 채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상황에 고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고민은 우리가 대북(對北) 지원 여부를 고민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어차피 남북한이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같은 협력과 상생의 길을 북한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걸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북한 마음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의 진짜 고민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