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暎浩 <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 >

미국이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 끝나고 나면 항상 세계 질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라크전쟁 조기 종결에 대한 미국 내 여론과 의회의 움직임에 비춰볼 때 조만간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전쟁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가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정책 변화의 바람은 동북아 지역과 한반도에도 불어닥칠 것이다.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쟁 종결을 위해 닉슨독트린을 발표했을 때 한국은 설마 주한미군을 줄일까 했지만 미국은 일방적으로 2만명 감축을 통보했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어떤 전략적 발상을 갖고 '큰그림'을 그려나가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국익의 관점에서 제대로 된 대응책을 마련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근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조셉 나이 하버드대학 교수에 의해 작성된 미·일동맹에 관한 '신(新) 아미티지 보고서'는 향후 미국의 동북아 지역에 대한 전략적 발상(發想)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2000년 발표됐던 '아미티지 보고서'는 부시행정부 집권 이후 동북아 전략 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2020년을 겨냥한 장기 비전을 담고 있는 이번 새 보고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과 관련해 선택 가능한 네 가지 전략 구도를 검토하고 있다.

우선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적 지위를 추구하고 일방적으로 지역 질서를 요리하려고 하는 것은 미국의 국력의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이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함께 일종의 '미·중 협조체제(condominium)'를 구축해 이 지역 질서를 관리할 경우 일본뿐만 아니라 여타 기존 미국의 동맹국들로부터 심각한 저항에 직면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미국이 중국을 위협으로 간주해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항하는 구도를 만들 경우 생겨날 '새로운 아시아판 양극체제'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게 될 경우 아시아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중국에 줄을 서거나 미국에서 이탈해 중립으로 선회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보고서는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하되 사안별로 중국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고 지역 질서 관리를 위해 중국의 적극적 역할을 인정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符合)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북핵 문제와 같은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틀'을 통해 중국과 협력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11월 부시 대통령이 하노이선언을 통해 한국전쟁 종전 선언 카드를 던진 것도 '신아미티지 보고서'의 전략적 발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아미티지 보고서'에 나타난 전략적 발상은 냉전시기에 형성된 미국의 대(對)중국 봉쇄정책이 질적으로 변화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1949년 중국공산혁명이 성공했을 때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에서 하나의 전략적 중심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 질서를 짰다. 당시 미국의 전략가들은 '마오쩌둥의 중국'은 인구만 많을 뿐 군사력 경제력 수준에서 구석기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전략적 변수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인해 소련과의 냉전대결에서 수세에 몰린 미국은 중국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끌어들이고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을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 21세기 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과 모든 면에서 쌍벽을 이루는 국가로 등장했고 이제 미국의 전략은 일본 중심에서 일본-중국을 동시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신아미티지 보고서'의 주장대로 21세기 동북아 질서가 미국-일본-중국 3국의 긴밀한 협력 아래 움직일 경우 한국의 운신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고 전략적 선택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북핵 위기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한말(舊韓末)처럼 주변 열강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국가안보는 경제의 펀더멘털 중 펀더멘털이다. 기존 안보구도에 급격한 변화가 오면서 안보불안이 발생하지 않도록 오로지 국익의 관점에서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하고,이번에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판으로 해 기존의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미래의 전략적 불확실성에 대비해 나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