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쓰레기통을 당장 양철통으로 바꾸세요."

지난달 29일 서울 대치동 무역전시장(SETEC) B홀 앞.'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 컬렉션' 개막을 몇 시간 앞두고 루비나 신임 회장의 말 한마디에 사무국 직원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패션쇼장 입구에 놓여 있는 쓰레기통까지 이번 컬렉션에서 선보일 의상 트렌드에 맞게 '메탈릭 소재'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컬렉션은 관객들에게 하나의 문화 체험입니다. 따라서 패션쇼가 열리는 장소는 뭔가 달라야 합니다.

작은 소품 하나라도 분위기를 깨선 곤란하죠.'미래주의'가 올 가을·겨울 의상의 경향이니 만큼 휴지통도 양철 재질로 된 걸 갖다놓으라고 한 겁니다."

지난 2월 SFAA 9대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자신의 패션쇼를 위한 옷을 디자인하랴,처음으로 운영 총괄을 맡은 컬렉션 준비를 챙기랴,'1인 2역'에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국경제신문사가 후원해 지난 1일까지 나흘간 열린 이번 SFAA 컬렉션에는 예년보다 관객이 20% 늘어 연인원 6만명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뤘다.

사무국 관계자들은 "회장이 사전 홍보에서부터 관객 동선까지 섬세하게 챙긴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루비나 회장은 이름만큼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1970년대 샹송을 부르는 가수에서 모델로 전향했다가 자신에게 꼭 맞는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보고 싶어 독학으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1980년 신진 디자이너의 등용문인 중앙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입상해 정식으로 디자이너로 데뷔,1990년부터 SFAA 멤버로 매년 두 번씩 꼬박꼬박 컬렉션에 참가해왔다.

루비나 회장은 그동안 컬렉션 참가 멤버로서 "서울컬렉션이 마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한 장소를 정해놓고 순차적으로 패션쇼가 열리는 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말했다.

앞선 패션쇼가 끝나면 1~2시간 안에 무대 설치를 모두 마쳐야 하다보니 디자이너의 개성을 살린 쇼 연출이 불가능하다는 것.

"내 옷과 패션쇼의 컨셉트를 어떻게 잘 보여줄까만 고민할 땐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을까'라고 생각했는데,막상 회장을 맡고 보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2003년부터 SFAA는 뉴웨이브인서울(NWS),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KFDA) 등 다른 디자이너 단체와 함께 컬렉션을 열고 있다.

통합 컬렉션의 주최와 장소 제공은 서울시가 맡는다.

그러다보니 장소의 다변화가 쉽지 않았던 것.

루비나 회장은 서울시와 담판을 지어 이 문제를 해결해냈다.

올 추계 컬렉션부터는 기존 SETEC과는 별도로 청계천변 특설 무대에서 일부 디자이너의 패션쇼를 열 예정이다.

"일단 한 걸음을 내디뎠으니 이제 뛰어갈 일만 남았죠.앞으로 서울 컬렉션은 기간만 정해 놓고 디자이너들이 각자 개성 있는 장소에서 패션쇼를 동시다발적으로 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디자이너들이 예산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자생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겠죠."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