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술 속으로] (3)고려청자를 재현한 도예가 우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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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예가 우치선은 수세기 동안 맥이 끊겼던 고려청자를 재현해냈다는 평가로 유명하다.
1919년 황해북도 송림시 인근에서 태어난 우치선은 고려청자의 신비스러운 비취색을 살려내는데 일생을 바쳤다.
어린 시절 고령토를 운반했던 아버지의 배 위에서 좋은 흙을 직접 만져봤던 경험이 훗날 청자를 재현해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우치선은 어려웠던 일제시절,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남포시 송림도자기공장과 개성고려자기공장 등에서 일하며 도예 기술을 익혀 나갔다.
해방 후에는 송림도자기공장과 남포도자기공장 공장장을 지내기도 했다.
질 좋은 고령토를 찾아 도처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흙 배합에 고심하기도 하면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던 그는 1950년대 중반 선교도자기공장 준비실장을 맡으며 고려청자 복원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60년대부터 제작에 나섰다.
1981년부터 만수대창작사 도자기창작단에서 활동했고, 후에 '인민예술가'와 최고의 영예인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받았다.
슬하에 3남매를 뒀는데 모두 도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치선은 지난 2003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작품으로는 <만병초무위청자꽃병>, <구름학무늬반상기>, <학과솔잎무늬상감청자 꽃병>, <학과소나무상감무늬청자 꽃병> 등이 있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작년에 열린 남북공예교류전 등 각종 국내 전시회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자료제공: 포털아트 www.porart.com>
한경닷컴 문정현 기자
1919년 황해북도 송림시 인근에서 태어난 우치선은 고려청자의 신비스러운 비취색을 살려내는데 일생을 바쳤다.
어린 시절 고령토를 운반했던 아버지의 배 위에서 좋은 흙을 직접 만져봤던 경험이 훗날 청자를 재현해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우치선은 어려웠던 일제시절,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남포시 송림도자기공장과 개성고려자기공장 등에서 일하며 도예 기술을 익혀 나갔다.
해방 후에는 송림도자기공장과 남포도자기공장 공장장을 지내기도 했다.
질 좋은 고령토를 찾아 도처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흙 배합에 고심하기도 하면서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던 그는 1950년대 중반 선교도자기공장 준비실장을 맡으며 고려청자 복원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60년대부터 제작에 나섰다.
1981년부터 만수대창작사 도자기창작단에서 활동했고, 후에 '인민예술가'와 최고의 영예인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받았다.
슬하에 3남매를 뒀는데 모두 도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치선은 지난 2003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작품으로는 <만병초무위청자꽃병>, <구름학무늬반상기>, <학과솔잎무늬상감청자 꽃병>, <학과소나무상감무늬청자 꽃병> 등이 있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작년에 열린 남북공예교류전 등 각종 국내 전시회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됐다.
<자료제공: 포털아트 www.porart.com>
한경닷컴 문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