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투명사회협약 대국민 보고대회'.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관료 등 수백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는 단연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유독 이 회장 주변에만 취재진이 몰렸던 것.그리고 이날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을 것"이라는 그의 발언은 다음날 국내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비단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A기업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의 발언이 나온 직후 회사 내부에서 현재의 상황을 심도있게 되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얘기들이 나온다"고 한다.

새삼 이 회장이 재계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이 회장은 별 말이 없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침묵의 경영자''은둔의 경영자'로도 불린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세인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최대 기업의 총수라는 지위를 떠나 경영인으로서 그가 우리 사회에 화두로 던져왔던 '위기의식'과 '미래에 대한 통찰'들이 대부분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앞세워 삼성이란 기업을 넘어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짚어내고 이를 '아젠다'로 제시해왔다.

'신경영'이 대표적이다.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주창하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그의 발언은 삼성그룹의 변화를 역설한 내용이지만,국내 다른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낡은 것을 버리고 혁신을 추진하지 않으면 자칫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심어준 것.한 달 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국가로 보나 삼성으로 보나 보통의 위기가 아니다.

정신 안 차리면 구한말 같은 비참한 사태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의 위기와 국가의 위기를 동일시하고 있는 듯한 발언이다.

1995년 이른바 '베이징발언'도 마찬가지.당시 이 회장은 "정치는 4류,관료는 3류,기업은 2류"라고 말하며 "어느 나라나 정치인과 관료,언론인,기업인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 협력해야 선진국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3년 9월에는 "핀란드와 스웨덴 등 강소국을 배워야 한다"는 '강소국론'을 주창한 데 이어 이듬해인 2004년에도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사문제 등 수많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2만달러론'을 강조했다.

매번 내용은 달랐지만 이 회장의 발언이 주목받는 까닭은 그때그때 우리 경제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한 적절한 지적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이처럼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나라 걱정'을 하는 까닭은 뭘까.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은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삼성이 더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위기론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이 회장이 공식·비공식적으로 받아보는 수백건의 보고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국내외 손꼽히는 전문가 그룹을 수시로 만나 관심사를 청취하고 의견을 나눈다.

또 이 회장의 자택엔 전 세계 위성TV를 시청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이를 130개국에 나가 있는 삼성의 해외 네트워크와 연결시키면 이 회장은 앉아서 지구촌 구석구석의 정세와 동향을 꿰뚫어볼 수 있다.

결국 이 회장이 가끔 쥐어짜내듯이 던지는 단어들에는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한 '선견'과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다.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