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화학·의학·대기과학 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이 1978년 제창한 가이아이론(Gaia theory)은 환경론자들의 복음서(福音書)이자 그를 환경운동의 대부로 추앙받게 했다. 그리스 신화의 '대지(大地)의 여신'에서 이름을 따온 이 가설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구의 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바다,육지 등 생물이 아닌 모든 것까지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그가 지난해 '가이아의 복수'라는 책을 펴냈다. 가이아 이론의 후속편이다. 생명체로서의 지구가 스스로 회복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심각한 기후변화가 진전돼 2100년에는 겨우 10억명의 인류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내용이다.

이달 초 유엔의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는 수년 동안의 연구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에 대한 경고는 이미 숱하게 쏟아져 나왔지만,이번 보고서가 예고한 재앙은 한마디로 충격적이다.

이번 세기말까지 지구 표면온도는 20세기 말보다 1.8~4.0℃(최저 1.1~최고 6.4℃) 오르고 해수면은 18~59cm 높아질 것이라는 게 그 골자다. 100년내 북극 빙하가 녹아 없어지면서 인도양의 몰디브 같은 섬나라뿐 아니라,미국 뉴욕,일본 도쿄,중국 상하이 같은 해안 도시는 물에 잠기고 동·식물의 상당수가 멸종한다는 내용도 있다.

보고서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은 온실가스 방출이라고 단언했다. 인간이 태우는 화석연료가 기후변화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최소 90% 이상이라는 것이다. 당장 온실가스 배출을 2000년 수준으로 동결해도 앞으로의 기온상승을 막을 수 없고,이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그 때문일까.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선진 각국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유럽연합 27개국이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에 비해 30%까지 감축키로 합의했다. 그동안 이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미국도 기업들이 직접 나서 정부에 보다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했다.

흥미로운 것은 러브록 교수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재앙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원자력의 확산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특히 풍력이나 태양열 등으로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도 없고,언제 상용화될지 모르는 이들 청정에너지에 매달리는 것은 '녹색 낭만주의(Green Romanticism)'에 기댄 어리석은 환상이라고 환경론자들을 비난했다.

그는 심지어 "수천명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희생자도 앞으로 수천만에 이를 기상재난 희생자보다는 값싼 대가"라며,화석연료를 태워 매년 대기에 쏟아내는 300억t의 이산화탄소에 비하면 핵폐기물은 문제조차도 안되는 사안이고,자신에게 핵폐기물을 준다면 집 뒷마당에 묻고 그 폐열을 난방에 활용하겠다고까지 했다.

지난 16일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교토의정서가 발효된 지 2주년이었다. 우리 정부의 대책은 기껏해야 청정한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더욱 힘쓰겠다는 것이고,환경단체들은 그저 반(反)원자력 운동에만 골몰하고 있다. 기름 한방울 안나는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세계 10위다. 우리야말로 지금 한가로운 녹색 낭만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는 건 아닌지….

추창근 논설위원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