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熙秀 <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 >

이란 이슬람 혁명 28주년을 기념하는 열흘간의 축제 마지막 날인 지난 11일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광장에는 1000만 테헤란 시민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그러나 지금 이란은 이런 축제를 즐길 상황이 아니다. 핵 문제와 이라크 전쟁 등 눈앞에 닥친 긴박한 문제들로 긴장과 결속의 분위기가 더 강하다. 이란의 핵 개발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초강경 봉쇄 정책에 맞서,이란도 유럽과 러시아 인도 중국 등과 더 긴밀한 협력체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러시아와는 거의 매일 고위급 사절들이 오가면서 러시아 이란 알제리 등 가스생산국들을 묶어 석유수출국기구(OPEC) 같은 '가스수출국기구' 결성을 시도하고 있다. 또 중국과의 장기 석유 및 가스 공급 계약에 이어 인도와 '이란-파키스탄-인도'를 잇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통해 공급되는 1450억달러라는 초유의 장기 가스공급계약 체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근 부시행정부는 갈수록 격화되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도전에 이란 배후설을 흘리며 사태의 관심을 급속히 이란 쪽으로 몰아가는 등 양국은 이미 외교전과 심리전에 돌입했다.

이란 핵은 결국 평화적 이용권과 핵 기술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이란과 이를 핵무기 개발 의도로 단정하는 미국과의 한판 승부다. 러시아와 유럽 일부 국가들은 국제법으로 보장된 이란의 평화적 핵 사용권까지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국제원자력기구를 통한 사찰을 전제로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악조건과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기업은 이란에서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이란은 중동 최대 시장이다. 인구 7000만명에 세계 제2위의 석유생산국으로 천연자원까지 풍부한 나라다. 더욱이 7000년 오리엔트 문명의 보고(寶庫)로서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이란에서 지금 한국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한국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고 이란 가정 열 집 중 여섯 집이 한국 가전제품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란은 한국의 해외 건설,플랜트 수주 1위국이고,두 번째로 원유를 많이 들여오는 나라다. 에너지와 건설,가전을 중심으로 부동(不動)의 중동 1위 시장이 된 배경에는 우리 기업들의 열정과 이란 사람들의 일방적인 한국 짝사랑이 깔려 있다.

눈에 띄는 길거리 간판은 삼성 아니면 LG다. LG나 삼성을 아느냐는 설문조사에는 100%의 인지도를 보였고,선호하는 브랜드 조사에서도 LG와 삼성을 꼽는 사람이 60%를 넘는다고 한다. 한국제품은 이제 기호상품이 아니라 필수품이고 품격과 신분의 상징이 됐다. 우리 가전제품이 이란 전체 시장의 거의 65%를 점유하고 있다. 경제학 원리에도 없는 놀라운 신화가 창조되고 있다. 이곳에 나와 있는 우리 기업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중동시장의 성공 여부는 신뢰가 결정한다"며 우리가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진정으로 다가가는 자세가 최고의 마케팅 전략임을 강조한다.

이란 국민들은 마음으로부터 한국을 좋아하고 코리아라는 브랜드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의 한국사랑에 대해 이제는 우리가 화답(和答)할 때다. 미국과의 관계가 아무리 중요해도 독자적인 우리의 대(對)중동 전략은 있어야 한다. 세계는 이미 에너지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은 중동 에너지를 위해 이라크를 점령한 상태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중국의 후진타오 주석도 중동 에너지 외교를 최우선 미래 과제로 삼아 직접 발벗고 나서고 있다. 우리가 언제까지 중동을 별볼일 없는 주변부로 묶어두고,임기응변식 시행착오를 계속하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다.

정치적 교류가 부담되면 과감하게 문화로 풀어야 한다. 정기적인 스포츠 교류,고고학 발굴과 문화유산 보존사업 지원,이란 전문연구소 설립,7000년 페르시아 문명전 개최 같은 문화사업을 통해 최소한 두 나라 사이에 인식과 문화의 거리라도 좁히자. 그들이 열 걸음 다가올 때,우리도 한 걸음은 다가가야 할 것이다. 적대적 이해(利害) 당사자가 아닌 따뜻한 이해(理解)와 진정한 협력 파트너로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미국이 만들어 놓은 '악의 축'이 아닌 '선의 축'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