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俊石 < 한국산업기술재단 대표 >

최근 '묵공'이라는 영화를 봤다. 흥행 여부를 떠나 필자에게는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남달랐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공성(攻城)과 수성(守城)의 지략 대결을 흥미롭게 다룬 점도 매력적이지만,고대 사회 엔지니어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원래 동아시아 사회에서 기술과 기술인은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역사에서 엔지니어가 그들의 철학을 가지고 대중의 추앙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면,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집단이 묵협(墨俠) 집단이며 그들의 철학이 바로 묵가(墨家) 사상이다.

원래 묵가집단은 성곽의 축조 및 수리,방위 설비와 무기 제작,실제 전투 및 구호 활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문적인 기술인(工匠) 집단이면서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에는 축성술과 무기제작이 당대 최고의 기술이었고,따라서 묵가집단은 최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벤처인이었던 셈이다. 동시에 묵가집단은 겸애(兼愛),비공(非攻),상현(尙賢)이라는 사상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춘추전국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묵가집단이 당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단지 선진적인 기술의 개발자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기술을 만들려고 노력했고,강자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동시에 그들은 전투 때마다 새로운 방어 방법과 전술을 개발하기 위해 그들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기술혁신의 주체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의 존중을 받는 사상과 철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묵공'에서 주인공 혁리(유덕화 분)가 주목받는 이유도 그가 단지 성을 지키는 최고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새로운 전술을 마련했다. 한마디로 대중과 함께 하는 기술,고뇌하며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엔지니어만이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중과 함께 하는 기술을 현대적 용어로 풀어보면 '삶의 질을 위한 기술'로 불려질 수 있다. 종래의 기술개발이 주로 기업의 이익과 산업경쟁력 확보 위주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면,앞으로의 기술은 삶의 질을 고려해 고령자나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고,대중의 아픔을 해결해 주는 분야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묵공'의 주인공 혁리 같은 기술인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 산업자원부와 산업기술재단이 발표한 '2015 산업기술 비전 및 신산업기술 R&D전략'에서는 이러한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해 국민의 삶의 질을 제고하기 위한 산업기술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의 R&D 정책 목표를 산업경쟁력 확보 위주에서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로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단지 예산의 투입만으로 성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춘추전국시대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실천한 묵가집단의 사상과 철학이 이 시대의 엔지니어들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이유다.

기술에 관한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가히 '테크놀로지 춘추전국시대'다. 각국이 미래의 먹거리를 선점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선진국은 물론 개도국까지도 전략적인 R&D투자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자(賢者·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나라를 찾아 엔지니어들이 세계를 주유(周遊)하는 것도 춘추전국시대와 판박이다.

이러한 현대판 기술 춘추전국시대에 혁신적인 엔지니어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을 때,우리의 '삶의 질'도 한층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