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의 불황 터널을 벗어난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시절 단행된 우정성 민영화 같은 강력한 개혁 조치가 밑거름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도쿄에서 만난 일본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후카오 미쓰히로 일본경제연구센터 이사장은 도발적인 반론을 폈다.

"우정성 민영화는 기본적인 방향만 잡혔을 뿐이다. 실제 언제 어떻게 주식회사로 바뀔지는 알 수 없다. 고이즈미 정권의 최대 업적은 불황에도 불구하고 공공투자를 줄였다는 점이다. 경기 회복은 개혁 때문이 아니다.

수출이 잘 된 덕이다. 중국 수출은 연간 40% 증가했다. 대미수출도 비슷한 수준의 호황이다. 거기에는 엔화 약세가 자리잡고 있다."

후카오 이사장의 지적은 4년 연속 최대 이익을 경신하는 일본기업들의 재무제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요타자동차의 경우 작년 10~12월 석달간 엔 약세로 늘어난 영업이익이 300억엔.같은 기간 비용 절감액 200억엔보다 많다.

한 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도요타의 경우 달러화에 대해 1엔 떨어지면 영업이익이 연간 350억엔, 유로화에 대해 1엔 떨어지면 연간 50억엔의 영업이익이 늘어난다.

엔화 약세 때문에 못살겠다는 유럽 국가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엔 약세 저지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엔화가치는 유로화에 대해 158~159엔으로 사상 최저,달러화에 대해 121~122엔으로 4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엔 약세는 낮은 금리 때문이다.

정책금리가 연 0.25%로 미국보다 5%포인트나 낮다.

싼 일본 자금을 빌려 해외 고수익 상품에 투자하는 엔캐리 트레이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불만이 유럽국가들 중심으로 높아지고 있지만 일본에서 만난 정부 관계자나 기업인들은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된다"는 교과서적인 발언으로 일관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엔 약세를 방관하고 싶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아베 신조 정권의 환율 정책이다.

소비가 부진한 상태에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수출 확대가 절실하고 이를 위해 엔 약세를 유도하거나 최소한 방관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야마모토 고조 경제산업성 차관은 한 발 더 나아가 지난 1월 금융정책 결정회의에서 금리를 올리려 했던 후쿠이 도시히코 일본은행 총재를 겨냥한 듯한 발언을 했다.

"일본은행에 금리인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한 후 적정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일본은행은 독립성을 확보했지만 정책 목표는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성장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아베 정권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야마모토 차관은 거침이 없었다.

"인위적으로 엔화를 비싸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 의원들이 엔 약세에 불만이 있다면 자본 유입을 중단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러면 미 국채가격이 폭락해 미국 금리가 올라갈 것이다."

크레디스위스증권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시라카와 히로미치는 "올해도 물가가 오르지 않아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저금리로 부동산 시장에 투기가 일어날 경우 한두 차례 올리겠지만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크게 줄지 않는 상태에서 엔 약세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후쿠이 총재는 또다시 금리인상을 시도할 것 같다.

그는 "15일 발표되는 작년 10~12월 중 GDP(국내총생산) 통계가 좋게 나오면 20일 열리는 회의에서 금리를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압력을 이겨내고 소신을 관철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엔 약세의 피해는 한국에 엄청난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

작년 한 해 한국의 대일적자는 253억달러.중국에서 거둔 209억달러의 흑자 전부와 미국에서 낸 88억달러 흑자의 절반을 고스란히 일본기업에 갖다 바친 꼴이다.

지난 9일 도쿄에서 만난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학 교수가 세계경제연구원 초청으로 13일 한국에 왔기에 다시 한번 엔 약세의 파장을 물었다.

후카가와 교수는 "여러 나라가 엔 약세를 비판하지만 정부가 개입한 것도 아니고, 하반기 쯤이면 흐름이 바뀌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차관은 한 발 더 나아갔다.

"한국이 일본에는 적자지만 전 세계적으론 흑자다.

전 세계적인 시각이 중요하다." 급증하는 한국의 대일적자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들렸다.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