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현충로역에 내려서 앞산 자락의 충혼탑 쪽으로 5분쯤 걸어오르자 왼편에 수녀회 표지판이 보인다.

예수성심시녀회.전화로 인사를 나눴던 이 토머스 수녀가 정문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수녀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앞산 언덕배기의 1만여평에 수녀회의 총본부인 총원과 교육관,1985년 한국천주교 200주년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방한을 기념해 지은 어린이집(요한바오로2세 어린이집) 등이 자리잡고 있다.

토머스 수녀와 함께 총원 건물에 이르자 총원장 손일연 레아 수녀가 반갑게 맞아준다.

두 수녀의 표정과 눈빛이 참 맑고 따뜻하다.

"우리는 그냥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일하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인데,신문에 낼 일이 뭐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레아 수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두툼한 책자를 내민다.

1995년 수녀회 창설 60주년을 맞아 예수성심수녀회 60년사를 정리한 책 '주님 손안의 연장'이다.


책에는 수녀회의 창설 및 성장과정과 전개해온 활동 등이 상세히 소개돼 있는데,목차 다음 쪽에 나오는 수도원 문장이 특이하다.

빛을 발하는 십자가 아래에 도끼처럼 생긴 자귀를 잡은 손이 그려져 있다.

예수성심의 도우심에 힘입어 '주님 손 안의 연장'으로써 생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한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주님 손 안의 연장으로서 항상 대기하고 있는 시녀의 자세를 갖추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우리의 자랑이지요.

시녀란 예수님의 몸종으로서 가장 가까이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것은 곧 섬김과 겸손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요."

예수성심시녀회는 1935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와서 경북 영천군 화산면의 용평성당에서 일하던 루이 데랑드(한국명 남대영·1895~1972)가 창설한 수도회다.

1934년 용평성당에 부임한 남 신부는 처음부터 가난한 이를 가르치고 병든 이를 보살피며 사랑을 전했다.

그러다 6명의 동정녀들을 모아 이듬해 '삼덕당'이라는 공동체를 만들면서 빈민구제,무료진료,나병환자 구제사업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전개했다.

1949년에는 포항으로 터전을 옮겨 전쟁고아와 노인들을 보살폈고 1960년대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자리를 내주는 곡절도 겪었다.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포항시 대잠동으로 이사했는데,포철 제1고로 굴뚝이 올라간 곳이 우리 수녀원 성당 자리예요.

그래서 그런지 그곳에선 한번도 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해요."

500명이 넘는 고아와 노인들을 포함,700여명의 대가족이 이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이와 관련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수녀원의 성직자를 만나 '최대의 복지는 절대빈곤을 벗어나는 것이고,그러기 위해서는 꼭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포항시 대잠동으로 자리를 옮긴 수녀회는 사회복지 활동을 더욱 확대하며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인 수도회로 자리잡았다.

현재 수녀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은 성인여성 장애인생활시설인 '마리아의 집',행려자와 무의탁인 등을 보호·치료하는 '나자렛집',노인전문 요양시설 '햇빛마을',중증장애인 요양시설 '루도비꼬집',무료급식 시설인 '요셉의 집',포항성모병원,어린이집과 유치원 등 그 영역과 규모가 방대하다.

필리핀 프랑스 대만 일본 로마 볼리비아에도 진출해 사랑을 전하고 있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식구가 많고 살림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도와주는 은인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매달 1000원,2000원씩 도와주는 분들의 힘이 정말 크지요.

시설마다 자원봉사하는 분도 1000명씩 되고요.

저희들은 그저 아끼고 가난하게 살면서 정직하게 일할 뿐이지요."

레아 수녀는 "1935년 처음 시작했을 땐 끼니도 못 이을 정도로 가난했고 수녀들이 곤충을 채집해 외국에 팔아서 살림에 보탰을 정도였다"면서 "6·25 땐 피난갈 형편이 되지 않아 어린아이와 노인 등 200여 가족이 폭격 속에서 기도로 이겨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굶주려 죽지 않고 살았으니 기적이 아니냐고 했다.

"가난하게 사는 게 힘들기는 하지요.

그러나 돈이 없어서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한 경우는 없었어요.

우리가 부족하면 하느님이 채워주시고 이웃들이 도와주시니까요.

세상 가난을 우리가 다 막을 수야 없지만 사랑을 깊이,넓게 나누다보면 그만큼 따뜻해지는 것은 확실해요."

현재 수녀회의 회원은 625명.국내에 있는 수녀만 600명이나 된다.

레아 수녀는 "회원이 너무 많아서 관구를 분리하는 방안을 내년 총회에서 논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수도생활을 더 깊이 하기 위해선 회원 간의 관계가 깊어져야 하는데 식구가 너무 많아 그런 점이 아쉽다는 얘기다.

"세상이 복잡하다 보니 우리 삶에도 영향을 받아요.

새로 수도원에 오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익힌 것을 여기 와서 다 바꾸기가 어렵지요.

그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메마름 속에서 어떻게 더 풍요롭게 살고,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어요.

복잡할수록 단순해야겠지요.

그래서 기도생활을 더 강조합니다."

레아 수녀는 특히 "요즘 아이들은 너무 공부와 경쟁에만 매달려 애정결핍,정서불안 등으로 인한 상처가 참 많은 것 같다"면서 "수녀원에도 그런 상처를 안고 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수도자의 세상 걱정을 듣다 보니 어느새 오후 5시.수녀원 성당에서 수녀들이 성체(聖體)를 모시고 간절히 기도한다.

메마른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기를,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다 위로받기를,모든 이가 행복하기를….

대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