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기행] (22) 경기도 화성 천주섭리수녀회‥"삶을 섭리의 뜻에 맡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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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만에 다시 찾은 수녀원이라 더욱 반갑다.
본원 건물 앞의 넓은 정원을 곱게 물들였던 단풍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수녀들의 맑은 웃음은 그대로다.
지난 가을 처음 방문했을 때 "지금은 취재에 응할 상황이 못 되니 눈 내릴 때 다시 오라"던 주 데레사 수녀는 현관까지 나와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천주섭리수녀회.1963년 한국에 들어온 이래 병원,학교,어린이집,양로원,요양원,장애인복지관 운영 등 다양한 활동으로 시대의 필요에 부응해온 수녀들의 보금자리다.
왕림은 한국천주교에서 특별한 곳이다.
옛부터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1888년 수원교구의 뿌리인 왕림성당이 세워졌고 성당 뒤를 감싸고 있는 건달산(乾達山) 자락에는 수원가톨릭대,한국외방선교회 신학원,천주섭리수녀회,위로의 성모 수녀회,그리스도사상연구소 등이 자리해 '천주교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하늘에 닿는다'는 뜻의 산 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1층 응접실에서 자리를 함께한 관구장 서재숙 수녀에게 섭리의 뜻부터 물었다.
"섭리란 하느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요.
섭리의 뜻은 사람마다 자기 삶 안에서 달리 받아들이겠지만 모든 이의 삶은 그 분 안에 이뤄져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사는 삶을 지향합니다.
좋은 것,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장하게 되지요.
섭리에 의탁하며 믿고 내맡기면 기쁘게 살 수 있어요."
1851년 독일에서 천주섭리수녀회를 창설한 마인츠교구의 케틀러 주교는 당시 산업혁명 이후 심각하게 대두된 계층 간 갈등과 혼란,노동자들의 비인간화에 주목했다.
사회적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수녀회를 창설해 교육·의료 등의 분야에 헌신토록 했고,현재 세계 6개국에서 670여명의 수녀들이 활동 중이다.
국내에서는 인천 송월동의 섭리노인재가복지센터와 무료급식센터,섭리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비롯해 양로원인 '애덕의 가정'(화성),'다물 피정의 집'(인제) 등을 운영하고 있고,춘천시립양로원과 요양원,의정부성모병원,대전의 섭리가정 등에서도 일하고 있다.
이미 1970년대 재가복지사업을 벌였고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일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있다.
인천에선 '조이 하우스(joy house)'라는 쉼터와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고 오는 5월에는 외국인 노동자 초대잔치도 벌일 예정이다.
많은 일을 벌이고 참여하다 보니 수녀 136명의 수도생활은 바쁘기만 하다.
"예전에는 수도생활이 단순·소박했는데 지금은 사회와 현장의 요구가 복잡·다양해서 수도생활도 자꾸 바빠지네요.
바쁜 세상 안에서 일하면서 수도자로서 살려니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루 네 번의 기도와 피정 등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늘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수녀회가 하는 일은 500여 가족으로 구성된 섭리가족회와 은인들의 도움,그리고 수녀들이 각 기관에서 일하고 받은 돈 등으로 운영된다.
수녀들이 월급을 받으면 절반은 그 시설이나 기관을 위해 쓴다.
하지만 지금까지 돈 걱정을 하며 산 적은 없다고 한다.
하느님이 삶을 안내하고 다 채워주시기 때문에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게 바로 섭리의 영성이란다.
서 수녀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맡기면,마음만 열려 있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면서 사례를 하나 들려준다.
지난해 수녀회는 관구 총회에서 공장이 많은 화성 지역의 특성에 맞게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작게라도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다.
바로 그때 수원교구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2월부터 왕림에서 운영할 예정인데 수녀를 좀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서 수녀는 "수원교구에서 밥상 다 차려서 주셨다"고 했다.
섭리에 의탁하는 삶,그래서 수녀들은 언제나 즐겁다.
수녀회에는 수도생활이 좋다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나름대로 확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 중에는 그림,음악,간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도 많아서 수녀들이 모이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한다.
각자의 색깔이 어디에 가장 잘 어울릴지 배려하는 것이 관구장의 일이라고 서 수녀는 설명한다.
"각자의 개성이 사장(死藏)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요.
공동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개별성을 살려 함께 가는 노력이 필요해요.
공동체라고 해서 획일적으로 가다 보면 행복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각자를 조이기보다는 펼쳐놓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녀들이 모이면 언제나 호호깔깔,재미있어요.
누가 뭐라고 하거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웃으니까요.
사실 재미있는 일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웃을 준비가 돼 있거든요."
이렇게 즐거운 생활의 중심에는 '하느님 체험'이 있다고 서 수녀는 말했다.
하느님 체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일상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수녀들은 이런 체험을 매주 한 차례씩 서로 나누고 연례피정 때에는 글로 쓰기도 한다.
서 수녀는 "이런 체험이 있기 때문에 힘든 일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다"면서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수도원은 기숙사일 뿐"이라고 했다.
시대의 필요를 발견하고 채워주는 삶이 그래서 가능한 모양이다.
수도원을 나서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하다.
"선행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는 서 수녀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화성=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본원 건물 앞의 넓은 정원을 곱게 물들였던 단풍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수녀들의 맑은 웃음은 그대로다.
지난 가을 처음 방문했을 때 "지금은 취재에 응할 상황이 못 되니 눈 내릴 때 다시 오라"던 주 데레사 수녀는 현관까지 나와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천주섭리수녀회.1963년 한국에 들어온 이래 병원,학교,어린이집,양로원,요양원,장애인복지관 운영 등 다양한 활동으로 시대의 필요에 부응해온 수녀들의 보금자리다.
왕림은 한국천주교에서 특별한 곳이다.
옛부터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1888년 수원교구의 뿌리인 왕림성당이 세워졌고 성당 뒤를 감싸고 있는 건달산(乾達山) 자락에는 수원가톨릭대,한국외방선교회 신학원,천주섭리수녀회,위로의 성모 수녀회,그리스도사상연구소 등이 자리해 '천주교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하늘에 닿는다'는 뜻의 산 이름조차 범상치 않다.
1층 응접실에서 자리를 함께한 관구장 서재숙 수녀에게 섭리의 뜻부터 물었다.
"섭리란 하느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일이지요.
섭리의 뜻은 사람마다 자기 삶 안에서 달리 받아들이겠지만 모든 이의 삶은 그 분 안에 이뤄져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사는 삶을 지향합니다.
좋은 것,좋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장하게 되지요.
섭리에 의탁하며 믿고 내맡기면 기쁘게 살 수 있어요."
1851년 독일에서 천주섭리수녀회를 창설한 마인츠교구의 케틀러 주교는 당시 산업혁명 이후 심각하게 대두된 계층 간 갈등과 혼란,노동자들의 비인간화에 주목했다.
사회적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교육이야말로 시대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수녀회를 창설해 교육·의료 등의 분야에 헌신토록 했고,현재 세계 6개국에서 670여명의 수녀들이 활동 중이다.
국내에서는 인천 송월동의 섭리노인재가복지센터와 무료급식센터,섭리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비롯해 양로원인 '애덕의 가정'(화성),'다물 피정의 집'(인제) 등을 운영하고 있고,춘천시립양로원과 요양원,의정부성모병원,대전의 섭리가정 등에서도 일하고 있다.
이미 1970년대 재가복지사업을 벌였고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일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있다.
인천에선 '조이 하우스(joy house)'라는 쉼터와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고 오는 5월에는 외국인 노동자 초대잔치도 벌일 예정이다.
많은 일을 벌이고 참여하다 보니 수녀 136명의 수도생활은 바쁘기만 하다.
"예전에는 수도생활이 단순·소박했는데 지금은 사회와 현장의 요구가 복잡·다양해서 수도생활도 자꾸 바빠지네요.
바쁜 세상 안에서 일하면서 수도자로서 살려니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루 네 번의 기도와 피정 등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고 늘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지요."
수녀회가 하는 일은 500여 가족으로 구성된 섭리가족회와 은인들의 도움,그리고 수녀들이 각 기관에서 일하고 받은 돈 등으로 운영된다.
수녀들이 월급을 받으면 절반은 그 시설이나 기관을 위해 쓴다.
하지만 지금까지 돈 걱정을 하며 산 적은 없다고 한다.
하느님이 삶을 안내하고 다 채워주시기 때문에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게 바로 섭리의 영성이란다.
서 수녀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맡기면,마음만 열려 있다면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면서 사례를 하나 들려준다.
지난해 수녀회는 관구 총회에서 공장이 많은 화성 지역의 특성에 맞게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작게라도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다.
바로 그때 수원교구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2월부터 왕림에서 운영할 예정인데 수녀를 좀 파견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서 수녀는 "수원교구에서 밥상 다 차려서 주셨다"고 했다.
섭리에 의탁하는 삶,그래서 수녀들은 언제나 즐겁다.
수녀회에는 수도생활이 좋다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나름대로 확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 중에는 그림,음악,간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도 많아서 수녀들이 모이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한다.
각자의 색깔이 어디에 가장 잘 어울릴지 배려하는 것이 관구장의 일이라고 서 수녀는 설명한다.
"각자의 개성이 사장(死藏)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요.
공동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개별성을 살려 함께 가는 노력이 필요해요.
공동체라고 해서 획일적으로 가다 보면 행복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각자를 조이기보다는 펼쳐놓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녀들이 모이면 언제나 호호깔깔,재미있어요.
누가 뭐라고 하거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웃으니까요.
사실 재미있는 일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웃을 준비가 돼 있거든요."
이렇게 즐거운 생활의 중심에는 '하느님 체험'이 있다고 서 수녀는 말했다.
하느님 체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일상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수녀들은 이런 체험을 매주 한 차례씩 서로 나누고 연례피정 때에는 글로 쓰기도 한다.
서 수녀는 "이런 체험이 있기 때문에 힘든 일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다"면서 "하느님 체험이 없다면 수도원은 기숙사일 뿐"이라고 했다.
시대의 필요를 발견하고 채워주는 삶이 그래서 가능한 모양이다.
수도원을 나서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하다.
"선행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는 서 수녀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화성=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