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奇魚) 발견'.

1960년대 초 어느 일간지가 상반신은 고등어 같고 하반신은 여자의 몸 같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해외토픽난에 실으면서 붙인 제목이다.

며칠 후 그 신문에 '괴상한 물고기가 아니고 사진작업을 통해 조작한 포토 몽타주였다'는 웃지 못할 정정기사가 났다.

당시로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마그리트는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한국 진입에 성공한 셈이었고,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만나고 있다.

2002년 가을 파리의 주드 폼므 미술관에서 마그리트 걸작 회고전이 열렸을 때 미술관 측은 입구와 출구에 가건물을 짓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급조된 건물에서는 화집·포스터·엽서·머플러·티셔츠 등 온갖 아트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유럽인들이 이처럼 열광하는 것은 마그리트를 '문화스타'로 여기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마그리트 작품이 상식의 세계를 뒤집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었다.

마그리트는 서로 다른 개념의 사물이나 풍경을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의 기이한 풍경으로 바뀐다는 변증법적 방법론을 지켜온 작가였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무능한 지식인을 '초현실적'으로 꼬집었다.

프랑스 지식층을 통칭하여 '카르테지앙(Cartesian)'이라고 한다.

이성과 합리성의 표상인 데카르트의 자손이라는 긍지도 되고 꽉 막힌 답답한 친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당시 답답한 이성의 아성을 훨훨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의 곡예'를 통해 지식인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이 마그리트로선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그리트에게는 답답한 이성의 성(城)도 없었고,종교의 구속도 느슨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문학에서는 시인 이상이라는 '거물'이 나왔으나 미술계에서는 이만한 초현실주의 작가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교육 받아온 서양미술에서 초현실주의는 일종의 혁명에 속하는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근엄하고 단정한 모습의 마그리트는 시인이요 철학자로 변증법적 방법론을 냉철하게 구사해 온 당대의 거장이다.

'기어 발견'이라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 기회에 전시장을 찾아 마그리트의 작품을 제대로 접해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