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회만 보면 어떻게 될지 다 안다. " "비현실적이다. " TV연속극에 대한 말들이다. 그러면서도 시간 맞춰 기다리고 본다. '허황되지만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거나 '허구지만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이유다. 그러나 실은 다음회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 수가 많다.

신문이나 잡지의 연재소설도 비슷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궁금증 내지 중독성이 지속적으로 읽게 만드는 것이다. 연재소설이란 형태가 시작된 건 19세기 중반 영국의 찰스 디킨스 혹은 프랑스의 발자크부터라고 한다. 국내의 효시는 1906년 '만세보'에 실린 이인직의 '혈의 누'라고 본다.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무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후 신문연재소설은 민족의 삶과 역사를 담으면서 현대문학의 터전이 됐다. 염상섭의 '삼대',홍명희의 '임꺽정',박경리의 '토지',최인호의 '별들의 고향',김주영의 '객주' 등은 모두 연재소설을 통해 태어난 것이다.

볼거리 읽을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신문연재소설은 고단하고 척박한 삶에 시달리던 보통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거리이자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자연히 인기는 높았고 신문마다 현대물과 역사물 등 2편을 게재했다. 그러나 컬러TV가 일반화된 90년대 중반 1편으로 줄어들었다. 외환위기와 디지털시대 개막으로 90년대 말 사라지다시피 했던 연재소설이 재등장한 건 2000년대 초.

몇몇 신문에서 살려낸 연재소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리더니 정부의 유해매체물 심의 대상이 되게 생겼다고 한다. 연재소설의 선정성 논란은 새삼스럽지 않다. 정비석씨의 '자유부인'사건은 유명하거니와 90년대까지 현대소설은 물론 '금병매'(하근찬) 같은 역사물 속 표현을 둘러싸고도 항의 전화는 빗발쳤다. 대부분 "아이들 보기 민망하다"며 신문을 끊겠다는 위협이었다.

연재소설은 시대와 사회의 거울이었다. 재미를 위해 야한 대목을 가미할지언정 동시대인의 아픔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세간의 관심에 비하면 외설 시비 따윈 상관없다는 배짱이나 그렇다고 연재소설을 심의하겠다는 사람들이나 참으로 딱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