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의 흰 대리석 이마에선 선혈이 흐르고, 벽공에 부유하는 저 거대한 빵과 포도주 잔(중략).'

시인 박희진의 '르네 마그리트'란 제목의 시구(詩句) 일부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상황 설정인가 싶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 시구를 꼭 닮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시라고 하기엔 그저 마그리트의 작품을 읽어낸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그 자체가 시이기에.운좋게 해외에서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마그리트 전시를 접한 적은 있지만 화집에서 보았던 극소수의 작품 몇 점을 만날 수 있는 정도였고,그에 대한 갈망은 채울 수는 없는 아쉬움의 연속일 뿐이었다.

영화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의 명작을 훔치기 위한 수법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중절모 신사들의 종횡무진이 기억나는가.

아니 기억까지 거슬러갈 필요도 없다.

서울 명동 신세계본관 리노베이션 기간 동안 외관벽면 장식에 활용한 마그리트의 '겨울비'(Golconde)라는 작품이 이미 우리 서울 한복판거리 중심을 지켰었다.

그뿐인가.

마그리트는 광고,소설, 음악 작품 속에서 영감적 존재이고,아트상품의 주메뉴이며,우리나라 주요 대학교의 논술과 수능시험 문제에 단골로 나오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실은 우리가 그간 얼마나 마그리트와 깊숙이 소통해왔던가를 새삼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나는 삶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때,영감이 필요한데 좀처럼 나를 묶고 있는 일상의 더께를 스스로 벗기지 못할 때마다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마그리트 화집을 감상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보면 그림 속의 일상적 소재들,즉 사과 돌 새 중절모 신사 파이프 여인누드들이 일상성을 벗어난 의외적 상황전개의 주인공들로 등장한다.

바로 그 점이 마그리트 그림의 특징들이다.

추상화는 한눈에 감상이 힘들지만 구상화는 일단 구체적인 소재들이 보이기에 감상이 만만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그리트 그림들은 구상적 접근을 통해 관객들의 눈길을 잡은 후 말도 안되는 상황전개로 시선을 더욱 깊숙이 끌며 발걸음을 묶어 시간을 투자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사실상 그의 철학적 깊이가 더해져 관객들의 사고를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그리트 작품을 감상할 땐 반드시 작품 제목을 더불어 함께 챙겨보길 바란다.

제목을 읽고 작품을 보는 간격 사이에서 자신은 단지 감상자가 아닌 기획연출창작자가 되어 한편의 단편영화를 전개시키게 될 것이다.

나름의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작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정답은 없다.

내면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지막 전시관에서 실제 마그리트가 찍은 영화들을 보면 한층 더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 것이다.

결국 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에게 상상과 창조의 세계로 인내하는 징검다리적 존재이다.

마그리트 작품을 보고 나면 미술감상 요령이 생기고 미술세계가 조금은 더 만만해질지 모르겠다.

스스로 미술이라는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 요령을 체득하는 촉진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젬마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