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對美) 달러 환율이 910원대로 진입했다. 이로써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급격히 하락했던 원화가치가 9년이란 오랜 세월을 거쳐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되돌아 왔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가? 지금 현재로서는 또 다른 외환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1997년 12월 말에 40억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고가 지금은 2300억달러를 넘어섰다. 위기 발생시 대처할 실탄이 충분히 확보돼 있다는 말이다. 한편 외환위기 당시 300%를 초과하던 우리 기업의 부채비율도 지금은 100% 이하로 떨어졌다. 또한 금융기관의 자산 건전성을 나타내주는 BIS(국제결제은행) 비율 역시 외환위기 당시 7.0에서 현재는 13.0에 육박한다. 그동안 기업공시제도의 강화,지배구조 개선,집단소송제도의 도입 등으로 기업경영 투명성도 크게 증가했다. 그러므로 북핵위기가 심화되지 않는 한,외국자본이 우리 자본시장에서 급격히 자금을 회수할 이유는 별로 없다.
그렇다고 우리 경제가 정상적인 성장궤도에 다시 진입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기업들이 수십조원의 잉여자금을 쌓아놓고 있고 부채비율은 100%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투자대상을 못 찾고 있다는 반증(反證)이다. 외환보유고 확충에 절대적 기여를 한 경상수지 흑자도 부분적으로는 기업 투자가 감소한데 따른 결과다. 그동안 지속된 경상수지 흑자는 수출호조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기업투자 감소로 자본재 수입이 줄어든 데도 기인한다. 금융기관의 높은 BIS비율 역시 기업 투자가 줄어든 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업의 자금수요가 감소함에 따라 금융기관의 대출구성도 가계대출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은행권의 가계대출 중 60% 정도가 주택담보대출이다. 담보대출은 위험가중치가 낮기 때문에 장부상의 BIS비율을 향상시키는 데는 기여하게 된다.
기업투자 증가율의 감소가 우리 성장잠재력을 약화시킨 주된 원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환위기 이전 6%를 상회하던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계속 하락해 정부에서는 현재 5% 내외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부 기관에 따르면 이미 4% 초반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투자 감소는 외환위기 당시 과다한 투자로 부도위기까지 내몰렸던 많은 기업들이 안전성 위주의 보수적 경영행태로 돌아선 데도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투자에 따른 위험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수익모형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매력적인 투자기회는 소진돼 자본의 수익성이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동시에 적극적으로 시장수요를 창출하는 정책을 개발해 투자유인책을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어떠한가? 경제력집중 완화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근시안적인 목표에 사로잡혀 출자총액제한제도와 수도권 규제를 고집하고 있어 그나마 늘어날 수 있는 투자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행정도시,지방혁신도시 건설에 수십조원의 돈을 쏟아붓고 있다. 이로 인해 늘어난 유동성과 저(低)금리로 인해 강남 일부지역의 주택가격이 폭등하자,재건축규제 강화로 공급을 억제하고 보유세와 양도세를 대폭 올려 이른바 세금폭탄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 같은 수요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주택가격 폭등세는 계속돼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됐다. 한마디로 정부의 주택가격안정정책은 시장에서 참패했다. 늘어난 주택수요에 맞춰 공급을 확대하는 정책을 폈다면,건설투자가 활성화되고 이로 인한 소득증대로 새로운 소비수요가 창출되고 서비스산업 등 다른 산업의 투자로 이어지는 경제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었다. 정부정책은 시장의 자생적인 선순환기회까지 원천적으로 봉쇄(封鎖)한 셈이다. 그런데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내년 말 대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정부의 부동산정책과 같은 상대적 박탈감 해소를 위한 반시장적 정책공약을 남발해 대선 이후에도 정부정책이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