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김점동과 퀴리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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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여성 과학자가 처음으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김점동(金點童·1877~1910)이다. 지금까지 이 명예의 전당에는 모두 19명의 과학자가 올랐고,이번에 4명을 더 올리는데 여성은 이번이 처음이다.
5년 전 한국여성과학인협회에서 전화를 받았다. '한국의 여성 과학자 제1호'가 누구인지,그이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평생 한국과학사를 공부한다고 했지만,사실 그 때까지 나는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 부탁을 받고서야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김점동을 그 인물이라 판단하게 됐다.
김점동은 한국 역사상 여성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여 1900년 6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지금의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녀는 첫 여성대학 졸업자였고,첫 여자 의사였으며,첫 여성 과학자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선 지금까지 거의 무명이었지만,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과학자 퀴리(Curie,Marie·1867~1934)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김점동은 퀴리보다 10년 뒤(1877) 태어나 67세를 살았던 퀴리보다 훨씬 젊은 33세의 나이로 24년 먼저(1910) 세상을 떠났다. 퀴리는 김점동보다 앞과 뒤로 34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김점동은 퀴리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과학상의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1900년 전후의 우리나라는 아직 근대과학은 어림도 없던 그런 참담한 세상이었다.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고 있던 19세기의 유럽과는 비교가 안된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내재적 평가라 해도 좋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김점동은 아버지가 김홍택이고,여자 형제가 두엇 더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 이후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미국 선교사 일을 보아주던 아버지는 그녀를 스크랜턴 부인에게 데려갔고,스크랜턴이 세운 이화학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 덕택에 가난한 조선의 소녀 김점동은 어깨 너머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고,그 연고로 그녀는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결혼도 하게 되었다. 1893년 결혼한 남편은 박여선(1868∼1899). 이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조선의 처녀 김점동을 박에스터(朴愛施德 Esther Park)라 부른다. 2년 뒤 1895년 초 미국 여성선교사 로제타 홀을 따라 미국 유학을 떠난 김점동은 영어 공부와 1년 동안의 간호학교를 거쳐,1896년 10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녀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어도 배우고,물리학과 수학 같은 공부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0년 6월 이 대학을 졸업하여 조선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녀가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덕이었다. 선교사들의 원조가 끝난 다음 그들 부부의 생활비는 남편 박여선이 뉴욕의 농장에서,그리고 볼티모어의 식당에서,막노동으로 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을 졸업하기 반년 전에 박여선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이국 땅에 묻고 돌아온 박에스터는 꼭 10년 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병든 동포들을 돌보다가 1910년 자신도 폐결핵으로 33세의 삶을 마감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퀴리와 비교하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선진국에서 공부했고,결혼으로 박씨 또는 퀴리씨처럼 남편 성으로 불렸고,그리고 연구 과정에서 걸린 병(암과 결핵)으로 죽은 것 등이 비슷하다. 하지만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훌륭한 자식을 두었던 퀴리와 달리,1900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에게 그런 영광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비춰볼 때 김점동은 퀴리 못지않은 우리 역사의 선구자였다.
'한국의 여성과학자 제1호' 김점동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것을 보면서,나는 우리가 조상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퀴리만 잘 알면 그만인가? 우리 조상을 제대로 기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훌륭한 후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여성 과학자가 처음으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김점동(金點童·1877~1910)이다. 지금까지 이 명예의 전당에는 모두 19명의 과학자가 올랐고,이번에 4명을 더 올리는데 여성은 이번이 처음이다.
5년 전 한국여성과학인협회에서 전화를 받았다. '한국의 여성 과학자 제1호'가 누구인지,그이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평생 한국과학사를 공부한다고 했지만,사실 그 때까지 나는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 부탁을 받고서야 곰곰 생각한 끝에 나는 김점동을 그 인물이라 판단하게 됐다.
김점동은 한국 역사상 여성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여 1900년 6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지금의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녀는 첫 여성대학 졸업자였고,첫 여자 의사였으며,첫 여성 과학자였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선 지금까지 거의 무명이었지만,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과학자 퀴리(Curie,Marie·1867~1934)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김점동은 퀴리보다 10년 뒤(1877) 태어나 67세를 살았던 퀴리보다 훨씬 젊은 33세의 나이로 24년 먼저(1910) 세상을 떠났다. 퀴리는 김점동보다 앞과 뒤로 34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김점동은 퀴리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과학상의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1900년 전후의 우리나라는 아직 근대과학은 어림도 없던 그런 참담한 세상이었다.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고 있던 19세기의 유럽과는 비교가 안된다. 하지만 역사의 평가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내재적 평가라 해도 좋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김점동은 아버지가 김홍택이고,여자 형제가 두엇 더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 이후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한 미국 선교사 일을 보아주던 아버지는 그녀를 스크랜턴 부인에게 데려갔고,스크랜턴이 세운 이화학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 덕택에 가난한 조선의 소녀 김점동은 어깨 너머 영어를 공부하게 되었고,그 연고로 그녀는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결혼도 하게 되었다. 1893년 결혼한 남편은 박여선(1868∼1899). 이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조선의 처녀 김점동을 박에스터(朴愛施德 Esther Park)라 부른다. 2년 뒤 1895년 초 미국 여성선교사 로제타 홀을 따라 미국 유학을 떠난 김점동은 영어 공부와 1년 동안의 간호학교를 거쳐,1896년 10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녀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라틴어도 배우고,물리학과 수학 같은 공부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0년 6월 이 대학을 졸업하여 조선인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그녀가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덕이었다. 선교사들의 원조가 끝난 다음 그들 부부의 생활비는 남편 박여선이 뉴욕의 농장에서,그리고 볼티모어의 식당에서,막노동으로 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대학을 졸업하기 반년 전에 박여선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이국 땅에 묻고 돌아온 박에스터는 꼭 10년 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병든 동포들을 돌보다가 1910년 자신도 폐결핵으로 33세의 삶을 마감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퀴리와 비교하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가난한 나라 출신으로 선진국에서 공부했고,결혼으로 박씨 또는 퀴리씨처럼 남편 성으로 불렸고,그리고 연구 과정에서 걸린 병(암과 결핵)으로 죽은 것 등이 비슷하다. 하지만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고,훌륭한 자식을 두었던 퀴리와 달리,1900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점동에게 그런 영광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비춰볼 때 김점동은 퀴리 못지않은 우리 역사의 선구자였다.
'한국의 여성과학자 제1호' 김점동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 것을 보면서,나는 우리가 조상에 대해 너무나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퀴리만 잘 알면 그만인가? 우리 조상을 제대로 기리지 않고서는 우리는 훌륭한 후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