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承信 <한국소비자보호원 원장 Lchung@cpb.or.kr >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라는 영화였는데,그때의 잔잔한 감동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 배불뚝이 잭 니콜슨과 눈가에 굵은 주름이 파인 다이앤 키튼. 어찌 이들에게 애잔한 멜로를 기대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두 배우는 황혼기의 사랑도 파릇파릇한 청춘 못지 않게 찬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그 영화를 보면서 다이앤 키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50대의 여성이 저토록 매력적일 수 있을지,부러움이 얽힌 감정 속에서 영화를 본 것 같다. 배우가 뿜어내는 매력이 인상적인 영화였지만 무엇보다 두 남녀가 벌이는 심리전과 허물어짐은 재미를 떠나 긴 여운을 남긴다.

명예와 부(富) 등 모든 것이 갖춰진 조건 속에서 버릴 게 없는 이들에게 그러한 조건은 단단한 외피(外皮)가 되어 오히려 사랑의 장애물로 와 닿는 듯했다. 단단한 외피는 부와 명예일 수 있고,자존심일 수 있고,이기심일 수도 있다. 그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면 진심어린 사랑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해리와 에리카는 현명한 선택을 한다.

영화처럼 굳이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려 하다 더 큰 것을 잃을 때가 있다. 내것을 허물기 싫어서,손해볼까봐,변화가 두려워서,인정하기 싫어서,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 가까운 친구끼리,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사업자와 소비자의 분쟁에서,기업주와 근로자의 격렬한 쟁의(爭議)에서 우리는 얼마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왔는가.

필자가 몸담고 있는 소비자보호원에선 지난 한 해 약 30만건의 소비자 상담을 접수했다. 이 가운데 합의권고가 필요한 건은 피해구제 건으로 분류해 담당직원이 3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돼 있다.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소비자는 사업자와 격한 감정일 수밖에 없어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팽팽하게 대립하던 사업자와 소비자가 원만한 합의에 이를 때는 피해보상을 떠나 더 큰 것을 얻는다. 소비자는 사업자의 잠재 고객으로 남고,사업자는 소비자의 불만을 통해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가을,2년 전 보았던 영화를 새삼 음미해 본다. 해리와 에리카는 하나를 버리고 둘을 얻은 행복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