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 < 영화평론가 >

올해 추석 연휴엔 독특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그 영화는 바로 70년대 가족계획운동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잘살아보세'란 작품이다.

영화가 웃음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산아제한'이라는 코드다.

아이가 곧 재산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당시 정부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살자'라든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표어를 배포하면서 산아 정책에 매진했다.

1970년대 산아 정책의 배후에는 남아선호 사상의 배제와 당시 경제 사정에 비해 턱없이 높았던 인구 증가율의 억제 의도가 놓여있다.

70년대 한국의 산아제한 정책은 여성 운동의 한 면과 맞닿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나친 출산으로 위협받는 여성 건강에 대한 보호와 여성 인권의 성장,산아 제한과 가족 계획의 배경에는 이처럼 오래된 남녀 불평등의 역사가 매설돼 있는 것이다.

적게 낳는 것이 곧 선진화이고 그것이 계몽이라고 여기던 30년 전의 풍경이 코미디 영화의 소재가 되는 현재.과거가 코미디가 되는 매듭은 현재의 모습이 그 시절과 정반대의 형국으로 전도돼 있다는 데에 있다.

동시대 이곳 대한민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제 과도한 출산이 아니라 저출산이다.

세 자녀 이상을 출산하면 정부에서 육아보조금이 지급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라는 표어가 사방에 붙어있던 시절이 고작 30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75년생인 내게도,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피임을 강조하던 방송이 기억의 한 자락에 또렷이 남아 있다.

현재 가임 및 출산 가능 연령에 있는 20대 후반부터 30대에 걸친 여성들은 나처럼 70년대에 태어나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다.

엄밀히 말해 70년대생 여성들은 결혼을 위한 대학 교육보다 자아 실현과 자아 성장을 위한 교육과 자기 계발이라는 말에 더 친숙한 세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남녀의 가사 분담을 당연한 가정의 도덕으로 교육받고 여성이 단순한 육아와 출산의 도구가 아닌 사회·경제에 있어서의 중요한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라난 세대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최근 저출산에 대한 위기론이 이기적인 젊은 여성들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 이어지는 맥락과도 상통한다.

늦어진 결혼과 그와 비례해 줄어드는 출산,고령 출산과 그 위험에 대한 위기론은 수식을 떼어 내고 요점만 살펴보면 결국 동시대의 여성들이 아이를 늦게 낳거나 낳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 수렴된다.

자아 실현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느라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지 않고 어머니로서의 책임과 모성을 회피하려는 여성들.한 아이의 어머니로 익명화되기보다 이름을 가진 주체로서 활동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저출산 시대의 불안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실상 현재 대한민국의 시스템 가운데 출산과 육아는 고스란히 그것을 선택한 담당자의 몫으로 돌려지고 있다.

아이를 낳은 후 육아와 그에 따르는 비용과 시간의 문제가 모두 아이를 낳은 당사자의 의무로 책정되는 셈이다.

아이의 양육을 두고 시부모나 친정 부모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거나 비용 문제로 출산을 미룬다는 푸념들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수치로 환산된 저출산 문제의 도표 속에는 아이냐 자아실현이냐라는 극단적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받는 여성의 입장이 배제돼 있다.

저출산 시대,동시대 대한민국의 위기감이 완강한 이분법 속에서 공전하고 있는 것이다.

저출산 시대를 위험으로 인식한다면 고려해야 할 것은 생물학적,개인적 모성이 아닌 기능으로서의 모성과 양육의 개념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문제를 단순히 한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내부 문제가 아닌 사회적 공개념 속에서 반성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정부 정책이나 이를 다루는 기사들은 대규모 사업장의 보육시설 설치 비율이나 영유아 보육법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을 좀 더 세련화하고자 한다.

문제는 그 지적이 구체적인 생활의 영역에서 실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기능으로 전환돼야 할지도 모른다.

모성은 국가가 담당해야 할 기능 중 하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