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가구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부지입니다.

땅작업에 들어간 20억원만 건질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넘기고 싶습니다."

중견 건설업체인 D사의 K부장은 요즘 개발업체(시행사)들로부터 부쩍 이런 요청을 자주 받는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데다 금융권 대출도 어려워지자 금융비용 부담 등을 못 이긴 시행사들이 잇따라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택지를 매입하라며 세일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행사들의 제안은 건설사들마다 1주일에 평균 2~3건,한 달 기준으로는 10여건에 달한다.

개발사업팀이나 용지팀 등 공식채널을 제외하고 지인을 통해 은밀히 매입의사를 타진하는 비공식 제안까지 합칠 경우 사업권 매각의뢰는 1주일에 4~5건에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 K부장의 설명이다.

주택분양시장이 빈사 상태인 수도권 이남 지방에서는 심지어 지금까지 부지 개발에 들어간 비용보다 낮은 가격에 팔겠다거나,현재 공사 중인 주택건설사업을 아예 통째로 넘길테니 사달라는 제안까지 등장하는 형편이다.

수도권 택지매물 급증

최근에는 그나마 분양성이 낫다는 수도권 소재 택지를 내놓는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2~3년 전 비싼 가격에 토지를 매입했다가 막상 분양을 시작하려니 부동산 시장침체로 토지매입 비용과 공사비 등을 분양가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채산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기도 일산신도시 인근의 고양시 구시가지 지역에 있는 450가구 물량의 주택사업부지는 7~8개월째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급보증을 해 줄 시공사를 찾지 못해 사업이 중지된 오산시 원동 일원 1만여평의 부지도 4개월째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인천 부평에선 350가구 아파트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시행사인 J사는 분양 직전인 지구단위계획까지 마친 상태에서 사업을 포기하고,중견 주택업체인 Y사와 H사 등 4~5개 업체에 사업권 인수의향을 물어오기도 했다.

정경재 우림건설 이사는 "시행사로부터 공동사업 요청이 한 달에 40~50건에 달하고 이 중 10여건 정도가 사업부지 매입 요청 등 사업권 매각건"이라며 "지방의 주택사업부지의 경우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고 설명했다.


정 이사는 "수도권의 경우도 최근 6개월 전보다 30% 이상 늘었고 그나마 입지가 괜찮은 물건이 나오고 있지만 땅값이 너무 비싸 사업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사 중인 사업 부지도 매각

가까스로 시공사를 구했더라도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중도에 사업권을 포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초기 분양률이 20%를 넘지 못하고 완공 후에도 미분양이 장기화될 경우 공사비와 금융비용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상업지구에서 주상복합 아파트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3개 시행사들은 시행권(사업권)을 시공사에 넘기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울산지역의 주상복합 메카로 일컬어지는 번영로와 삼산로 일대엔 올들어 주상복합 인허가 신청이 지자체에 접수된 것만 20건이 넘지만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곳은 5개 사업장뿐이다.

시공사와 함께 사업을 진행 중인 일부 업체의 경우에도 초기 분양률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시공사에 사업권을 넘기는 방안을 협상 중이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적자 매물도

특히 미분양 물량이 속출하는 대구 울산 부산 등지에서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주택부지나 사업권을 넘기겠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대형 업체의 한 관계자는 "매물로 나오는 택지는 대부분 주택건설 물량 등 전체적인 개발 틀을 짜놓고 가격을 산정해 사 달라고 제안하는 것들이서 막상 사업성을 따져보면 수준에 미달하거나 예상 실적에 비해 아직도 가격이 높은 곳이 많아 업체들이 외면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지방 주택전문업체 관계자는 "회사들마다 자체 분양할 계획인 곳도 사업성이 없어 미분양이 날까봐 걱정인 상황에서 부지 매입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면서 "이러다 보니 지방 택지 가운데 가격 등이 괜찮은 곳도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어 수개월째 매물로 돌아다니는 형편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태철 기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