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유통업체 간 판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찰판매를 해온 하이마트 등 전자전문점과 대형마트(할인점)들이 즉석에서 가격을 깎아주는 등 사실상 '흥정가격제'로 돌아섰다.

점포에 따라 정찰가격보다 5% 이상 싸게 살 수 있게 된 가운데 흥정 할인폭은 더 확대되는 추세다.

무너진 가격 정찰제

26일 서울의 한 이마트 가전 매장.주부 A씨가 289만원이란 가격표가 붙은 LG전자 엑스캔버스 LCD-TV(42인치)를 놓고 담당 직원과 흥정을 벌였다.

"옥션에는 259만원짜리 물건도 있던데 깎아주면 안됩니까?" "그 정도로 낮춰주긴 곤란하지만 다른 가전 매장 가격보다는 싸게 드리겠습니다." A씨는 결국 정찰가보다 5% 싼 274만5000원을 주고 원하던 TV를 샀다.

'흥정'은 다른 유통 채널에서도 통했다.

인근에 위치한 전자전문점 하이마트는 동일 상품을 269만원에,LG하이프라자는 270만원까지 할인해 주고 있었다.

가전 유통 시장에서 가격 정찰제가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대형마트와 전자전문점 간 주도권 싸움이 빚은 결과라고 지적한다.

대형마트들이 단가가 높은 가전 판매를 확대,매장당 매출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즉석 추가 할인 판매에 나서자 하이마트가 맞대응에 들어간 것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하이마트의 경우 인근 대형마트 판매가격보다 1만∼2만원 싸게 파는 것을 판매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전회사들,"우린 어쩌라고"

유통업체들이 무한 가격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가전 제조회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삼성전자 등 대부분 회사는 자사 가전제품 매출의 절반 이상을 하이마트 등 전문점이나 대형마트에 의존하고 있어 이들 유통업체의 '마진 축소를 통한 판매가 추가 인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동엽 삼성전자 국내 마케팅부장은 "올해부터 모든 유통업체에 대해 연간 단위 계약을 맺는 것으로 바꿔 출고가를 재조정하는 일은 사라졌다"면서도 "대신 유통 매장에 파견하는 우리 회사 직원교육 수준을 높이는 등 가격 외적인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가전 판매 단가가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조사의 고민은 커져만 가고 있다.

실제 하이마트 평균 판매가를 기준으로 PDP-TV 가격이 2004년 600만원에서 7월 현재 280만원 등으로 급락한 것을 비롯 양문형 냉장고와 드럼세탁기의 올해 평균가 역시 같은 기간 각각 9%,14%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자랜드나 개인 대리점 등 '바잉 파워(buying power)'가 약한 유통 채널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동네 슈퍼가 사라졌듯이 당장은 아니겠지만 제조사로부터 비싼 가격에 납품받을 수밖에 없는 유통 채널은 출혈 경쟁이 지속된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동휘·장성호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