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 >

어쩌다 켜놓은 TV에서 창백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를 보는 것 만큼 괴롭고 가슴 아픈 일도 드물다.

불치병에 신음하는 아이들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동정,고통을 함께 느낀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 손은 저절로 전화기를 집어든다.

한 통이 아니라 열 통인들 못하랴.이웃의 고통을 나누는 심정으로 기꺼이 모금에 동참한 뒤에도 화면에서 본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이 저녁 내내 눈에 밟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저 불쌍한 아이들을 고쳐줄 병원이나 의사는 없을까? 혹시 독지가가 나타나지는 않을까.

신은 어쩌자고 가엾고 어린것들에게 저토록 가혹한 고통을 준단 말인가!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슴앓이를 하고 나면 그제야 드는 의문은 국가의 존재 의미다.

도대체 나라는 무엇을 한단 말인가! 세금은 거둬서 어디에 쓰고,법과 제도는 누구를 위해 있단 말인가! 차츰 나아지고 좋아지겠지 싶다가도 한편 돌이켜보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는 슬픈 풍경이다.

비슷한 얘기겠지만 여름에 장마만 졌다하면 어김없이 국토 한쪽에선 물난리가 난다.

물난리뿐이랴.우리나라 기상청의 자연재해 예보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하늘에선 잔뜩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마저 치는데 기상청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햇볕 쨍쨍'이다.

예보부터 어긋나니 뒷일이야 불 보듯 뻔할 수밖에.그래서 피해와 이재민이 속출하면 또 어김없이 '장병'들이 재해복구에 나선다.

국가의 재해극복 시스템은 예나 지금이나 만만한 '국군장병'밖에 없는 듯하다.

상도(常道)는 없고 예외가 상도 노릇을 하니 백날 가야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성금 모으기,금 모으기가 성행하는데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때마다 국민은 지금 월드컵을 응원하듯 한결같은 마음으로 협조하고 헌신한다.

세상에서 이런 국민도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국가는 여전히 할 일을 미루고 곤란한 일은 무조건 국민이 떠맡는다.

국가가 할 일이란 시급한 제도와 미진한 시스템을 하루빨리 만들고 확장하는 것이다.

세계 10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면서도 병든 아이들을 제도로써 돌보지 못하고,해마다 국민에게 자연재해를 겪게 하는 속수무책 시스템이 생각할수록 한심하다.

유류값이 위험수위를 넘나들 때마다 정부가 내놓는 계획 역시 국민 불편을 담보로 한 '차량운행 제한' 하나뿐이다.

재수가 없는 날엔 교차로에만 갔다 하면 신호에 걸린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호체계만 조정하면 상당량의 기름 소비량을 절약할 수 있다는 데도 그런 노력을 하는 정부 부처는 찾아볼 길 없다.

좁은 골목길 신호등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밤중에도 오랫동안 차들을 가로막고 놓아주지 않는다.

교통량을 감안해 필요한 장소에선 야간에만 점멸등으로 바꿔도 기름 소비를 꽤나 줄일 수 있다.

정작 정부나 공무원들은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10부제,5부제를 논하고들 있으니 국민 협조가 뒤따를 턱이 있는가.

행정은 국민을 편리하게 해주는 고도의 서비스다.

그런데 이 나라 행정은 서비스는커녕 고질적인 편의주의 발상에서 한치도 못 벗어난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방금도 우리는 대한민국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보라,저 뜨겁고 열정적인 우리 국민의 애국심을! 국가부터 부디 각성하고 가일층 분발해서 월드컵에서 느낀 자랑스러움과 감동을 일상에서도 항상 느낄 수 있는 그런 날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