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22년 9월22일(무인)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을릉도와 독도를 지킨 안용복이 비변사(備邊司)에서 진술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영해에 사는 유일부와 함께 배를 타고 섬에 이르렀는데 왜선이 많이 와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우리 어부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을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지경을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겠다'하고 꾸짖으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연히 고기 잡으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태조에서부터 철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치·문화·사회·경제 등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방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기상변화나 질병,민심 등도 활동사진처럼 훤히 보인다.

말 그대로 실록(實錄)은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이어서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실록편찬은 철저하게 독립된 사관이 담당했기에 세계 어느 나라 역사서보다도 객관성을 인정받고 있다.

왕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관 2명이 따라다녔다.

한 명은 왕과 신하간에 오간 대화와 토론내용을 기록하고,또 한 명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표정까지도 기술했다.

이런 사초를 기반으로 왕이 죽은 뒤 실록이 편찬됐다.

재위 중의 왕이 자신의 행적을 적은 사초를 보는 것은 금기여서,조선건국의 시조였던 태조조차도 사초를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서울 충주 성주 전주 사고(史庫)에 1부씩 보관했다.

외침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전주본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됐는데,그후 복사본이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오대산 본(本)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강탈당했다.

이 오대산 본이 약탈된 지 93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조선실록의 반환을 계기로 우리의 훌륭한 기록문화의 전통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